없으며 없을지라도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요즈음 한국과 미국을 보면 좋은 일들이 별로 없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마찰도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뉴스가 마음을 어둡게 만듭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살던 시대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국내외적으로 너무 힘겨운 시대였습니다. 공의가 실현되지 않아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바벨론이 유대를 침략하리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침공 소식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떨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하바국 선지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심판의 날이 오면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세상을 의로 통치하시고 심판하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의 입술에서 탄식이 멈추고 찬송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하박국의 감사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모든 것들이 없다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두렵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언젠가는 채워주실 줄 믿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회복될 수 있읍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환경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우리도 그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궁극적 승리를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의 감사와 ‘그러나’의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의 감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하면 '그러나'의 감사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바로 '그러나'의 감사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감사입니다. 비록 자기의 조국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의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날을 도우시고 인도하실 줄을 믿고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하십니다.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에도 감사하라. 성공했을 때만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감사하라. 건강했을 때뿐만 아니라 병들었을 때에도 감사해라. 태어났을 때뿐만 아니라 죽었을 때에도 감사하라. 취직을 했을 때뿐만이 아니라 실직을 했었을 때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학문도, 지식도 명예도 권력도 그 어마어마한 배경도 가문도 그는 다 잃어버리고 지금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집도 없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입니다. 손수 천막을 지어서 겨우 먹고사는 막노동자 신세입니다. 장가도 못 들었고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홀홀 단신 외로운 사람입니다. 게다가 몹쓸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다 찬성을 받는, 환영을 받는 그런 처지도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하고 붙잡혀서 갇히기도 하고 세 번씩이나 감옥에 갔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모략을 받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간적인 배신이 사도 바울을 더욱 힘들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적인 조건으로 볼 때 무엇하나 감사할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믿었고 또 성령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가 그 마음속에 차고 넘쳤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이라야 감사할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지금의 내 처지가 불행하고 힘들고 그래서 하나님께 도저히 감사드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니 나의 이 불행과 나의 모든 처절함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고 절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잘못되게 하실 분이 아니시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니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들도 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주셨고 좋으신 하나님이셨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앞으로의 나의 삶도 지켜 주실 줄로 믿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은혜가 오늘 이 아침 여러분들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56세된 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태어날 때 의사가 집게로 뇌를 건드려서 소뇌를 손상했다고 합니다. 이 신체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소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똑바로 고개를 하고 싶어도 자꾸 옆으로 기울어지고 7살이 되도록 누워만 있었다고 합니다. 10살이 되서야 숟가락을 스스로 간신히 쥘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의 집은 너무도 가난한 집이었고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부모님과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운명을 저주하기도 했고 그래서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7살이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더라도 한 번 하나님을 만나서 따져보고 죽어야 되겠다. 아주 작정을 하고 목숨을 걸고 기도를 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 모양으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며 도대체 이런 몰골로 내가 세상을 살아야 될 의미가 무엇이냐. 하나님께 마구 대어들며 따졌습니다.
오랜 기도 가운데 이 여인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계속 기도를 하는 가운데 수많은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장애자 여성이 쓴 "나" 라는 시를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여성이 지은 시입니다.
이 뇌성마비 장애여성이 가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걸을 수가 있는 사람입니까? 자유롭게 말을 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까? 찢어지게 가난하죠,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이가 서른 여섯입니다.
남들처럼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가정을 꾸미고 애를 낳고 무슨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아니 그런 희망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보통 우리들은 그런 사람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 거참 불쌍한 사람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동정을 하기가 일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처지가 처절하서 당신들이 나를 동정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주었다. 당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여성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서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양 늘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문사 기자가 이 장애여성을 인터뷰를 했는데 만나보니 지난해 말부터 목 디스크가 와서 온 몸이 저려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자들 만난 그녀는 뜻밖에도 노숙자들을 걱정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길거리를 헤매이는 이 노숙자들 거리에서 그냥 놔두면 얼어죽을텐데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노숙자들을 걱정하고 있더래요.
그래서 휠체어에 앉아서 고개를 흔들며 절규하듯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하고 이웃을 걱정하는 이 장애여성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아름답게 치장한 어떤 신부보다도 아름답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감사라는 말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을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신자를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까?
보통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뜻밖의 무엇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며 걱정하던 것이 잘 풀렸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감사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무슨 특별히 좋은 일이 없어도 감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일들, 그냥 하루 세끼 먹고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식구들과 저녁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잠자고, 공부는 좀 못해서 그렇지만.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칭찬 받을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송명희 시인은 뇌성 마비환자로 있으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외형적인 조건은 옛날보다 좋아진 것은 없지만 그 악조건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