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
눅 17:5-6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오늘 주님과의 대화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사도들은 이미 자기가 가진 모든 것(그물, 배, 세리라는 특권 등)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그분께 자기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를 일곱 번 용서하는 것과 같이 제자의 삶을 사는 데 있어 지금의 믿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병도 고치고 기적도 행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면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우리도 일상 가운데 자주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삽니다.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직장이나 학교에 갑니다. 혹 집에서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심신을 침대에 올려 두면 또 시작되는 내일이 기다립니다. 내가 가진 믿음으로는 일상 가운데 해야 할 일만 하는 것도 벅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크고 위대한 일은 나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셔서 주를 위해 살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작은 믿음을 통해 많은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크고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작다 해도 그 작은 믿음이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이 엄청난 일을 이루시고도 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지금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제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희 믿음이 너무 작아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으론 충분하다. 그 믿음이 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그 믿음을 통해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충분히 이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기에서 모래나 먼지 등을 예로 들지않고 겨자씨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겨자씨는 크기는 지극히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극히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그 속에 생명이 있는,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11장에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실예가 되는 많은 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연약하고, 감정에 치우치고, 넘어지기도 하고 우울증에 빠져 죽기를 간구하기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연약하였고 그들의 믿음이 겨자씨만 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 즉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믿음(히11:6)이 있었기에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께 그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에녹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서 살았고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5절),
노아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기에 대홍수가 임할 것임을 알고 방주를 지어 가족과 짐승을 구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상주심을 믿었기에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하면서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들은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하나님이 그 위대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기도하셔야 합니다.
막 9장에 가 보시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서 보니 큰 무리가 제자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나의 제자들) 변론하느냐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
예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일 후에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께서)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마17:20)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고 하셨습니다. 즉 그 말씀은 그들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의심하고 불평하느라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식어져 능력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는 물론이고 남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기로 우리는 냉장고도 사용하고 에어컨도 돌리고 밥솥으로 밥도 짓고 커피포트로 커피도 끓입니다. 그런데 그 전기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플러그를 벽에 있는 전기소켙에 꽂아야 합니다. 이 플러그를 전기소켙에 꽂는 행위가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믿음은 기도로 주어집니다. 기도하시면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면 응답받겠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나, 어디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죽을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를 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17장을 보면 귀신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귀신은 활동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짓이든 닥치는 대로 합니다.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게 하고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아무나 붙잡습니다.
그리고 귀신에게 붙잡히면 멀쩡하던 사람 주저앉고, 흥하던 사람도 망하게 되고 서있는 사람도 넘어집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 고통들, 실패들, 아픔들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려면 살아있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 살아있는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은 기도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마음속에 “기도하면 응답받겠다”는 믿음이 들어오고 그때 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응답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그 속에 생명을 가진, 역사를 일으키는 겨자씨 같은 살아있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까요?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로마서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성경구절 중의 하나는 롬 10:13입니다.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이렇게 쉽고 분명하고 간단한 것인데도 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일까요?
1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그런데 그 믿음 즉 구원을 가져오는, 구원을 경험되게 하는 믿음을 가질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만 구원얻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는 나오는데 말씀을 들을 때만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설교시간에는 말씀을 들을 때가되면 좁니다. 그러니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곡식이 자랄려면 씨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밭이 씨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마음을 옥토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을 갖고 싶으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을려고 애쓰십시오. “ 주님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 하고 기도하시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읽고 마음에 부딪히는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이 생깁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려고 하시면 발견하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0:17에서 말했습니다. “믿음은 본래 들을 때 생기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은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읽는 게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성경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전이나 회당에 가야만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랍비가 그 성경을 풀어서 해설해 줘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오디오 테이프를 틀고 들으란 말이 아니라, 내가 듣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게 들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말씀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시간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은 잘 하지만, 한 시간 들으라고 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기도의 순서를 따라 기도하고 딱 마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내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인가를 하려고 하시는데, 그냥 일어서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황당하시겠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많이 한다고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힘쓰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삶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큰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현재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믿는 믿음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감동을 만들고 감동은 축복과 기적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은 큰 믿음만 기다리지 말고 이 소녀와 같이 현재 있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