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낙원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
(눅 16:19-31)
요즈음 한국 뉴스 들으십니까?
최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국가 명단에서 배제함으로서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품목중 153개 항목은 90%이상 일본산을 대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산업에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역전쟁 경제침략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복수는 사실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현 한국의 정권이 일본을 적대시 하면서 야기된 결과라고 보수적인 신문사설은 말합니다. 그것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안타까움은 그러한 경제보복을 내다보고 대비했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예상하고 준비하지 않았던 그 피해는 기업하시는 분들만 아니라 산업현장의 가난한 직원들이 보게되는 것입니다.
임진왜란때도 대비를 외쳤던 이율곡선생의 고언을 외면한 결과 7년간의 왜란을 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대비하지 않으면 고생하거나 죽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간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비록 주인의 재산을 손해보게 하는 불의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해고이후를 준비하였기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인지라 듣고 비웃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남을 비웃었다는 행동의 의미는 자신이 더 지혜롭게여긴다는 것도 되고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어리석게여긴다는 의미도 됩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하여 그 유명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비유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낙원에 들어간 자의 실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한 부자가 호화로운 옷을 입고 매일 잔치를 즐겼습니다(19절).
그런데 그 부자의 현관에는 헌데를 앓는 몸이라 버려진 나사로라는 거지가 누워지내며 부자가 먹다 남은 음식물로 배를 채우며 지냅니다. 어느날 병든 나사로가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후에 부자는 음부로 들어가서 불꽃 고통가운데 있었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으로 들어가 안식했습니다. 음부에 던져져 고통을 당하는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고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을 찍어 자신을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과 부자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오고 갈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이어 그러면 나사로를 보내어 땅에 남겨진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해 달라고 하였지만 땅에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지않으면 설사 죽은 자가 살아나 가더라도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절합니다,
이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부자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그냥 어느 돈많은 부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비웃은 바리새인을 가르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는 지식도 있고 센스도 있는 사람일탠데 그가 할려고 했었다면 얼마든지 음부는 피해갈 수가 있었을탠데 왜 그는 불붙는 음부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생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까?
첫째로 이 바리새인의 잘못은 재물을 자신이 즐기기만 했지 재물을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에서 호화로운 옷을 입고 그의 삶을 즐겼다는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그들의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또한 그들은 그 재물의 축복을 누릴만한 특별한 부류의 사람으로 여기고 그 재물의 축복을 즐기기만 했지 그 재물중에는 자기가 사용해야할 몫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세금을 내듯이 재물이 필요한 남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맡겨놓으신 몫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은 남의 몫까지 다 자기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원히 불이 꺼지지않는 불못에 떨어져 고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만 듣다보면 마치 선행이 구원의 조건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전체를 볼때에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만 부자의 삶 가운데서 가난한 장애자 나사로를 동정하고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그리스도인은 긍휼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기에 동정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음이후의 삶을 준비하지않고 현세만 즐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거할 집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거처가 무너지는 날 그는 음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 란 말을 두고볼 때 부자가 음부에 들어간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고 복음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안식을 누리고,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으로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후의 세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마25장으로 가야 합니다.
(마 25: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거듭된 교훈에도 불구하고 재물에만 집착하여 당시 소외된 계층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며 사느라 하나님이나 이웃, 그리고 영원한 미래의 소망마져 생각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살지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사업에 부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주는 선한 청지기로서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참신앙이 인정받아서 천국낙원을 들어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세상에 자기 형제가 다섯이 있으니 권하여 여기에 오지 않게 나사로가 살아 돌아가서 지옥음부의 불못고통을 증언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제가 있는 마을에도 모세와 선지자들과 같은 전도자가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 말을 들으면 된다.”
그러자 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서 전해야 그들이 회개하고 믿지, 평범한 전도자의 말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또 말했습니다. “ 전도자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자는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돌아가서 천국낙원과 지옥음부를 전한다고 해도 비웃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기적을 목격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보고도 회개하거나 믿지를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남동생인 나사로가 죽었었지만 주님께서 그를 죽은 지 4일 만에 살려 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요 12장 10절에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오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부자의 말이 모두 틀렸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 라고 말할 때 그 믿는 다는 말의 의미는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으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 들일 때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믿게 되는 것입니다.
(롬 10: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엡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주님은 의심했던 도마에게 “너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대게 바리새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주일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하루 세차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지옥음부에 떨어진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은 그를 구원하기에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 16: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말은 그 형제들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은 외식적인 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외식적인 신자로 전락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전통에 근거한 신앙이었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를 두고 믿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부자에 대한 경고는 아직도 천국보다는 이 세상을 크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 설교자가 어느날 무신론자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무신론자는 말했습니다. “ 저는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설교자가 물었습니다.“그렇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신론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설교자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뭐라고요? 목사님도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임을 믿으신다고요?”
“예, 저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당신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의 끝입니다.
죽음은 당신의 모든 기쁨의 끝입니다. 죽음은 당신의 모든 계획들과 모든 야심들과 모든 관계의 끝입니다. 죽음은 당신이 들을 수 있는 모든 복음의 끝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고, 당신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 대해 말하자면, 죽음은 저의 모든 방황과 모든 눈물과 모든 좌절과 모든 실망과 모든 아픔과 고통의 끝입니다. 죽음은 이 모든 것의 끝이고, 저는 영광 중에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설교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말하며 무신론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