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시는 하나님(눅 15:11-32)
어느 유치원 학생의 일기장 내용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좋다. 언제나 친절하고 자상하시니까.
나는 집에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맛있는 음식들을 꺼내 먹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인형이랑 장난감이 있어서 좋다. 내가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나는 집에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 주니까.
그런데 아빠는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가정들을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존재감이 많이 약화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가정에서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엄마들과는 달리 바깥에서 활동하는 처지이다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권이 신장되고 페미니즘같은 남녀동권을 강조하다보니 자연 아버지의 권위가 옛날만 못하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교육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아버지가 없이 자란 아이들은 문제아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그 누구보다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읍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물질적, 정서적, 정신적 울타리가 되어지고 아버지는 자녀들의 가치관과 인격형성에 대단히 중요하고 아버지는 자녀들이 인생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비유 말씀인 본문은 유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병들고 지친 빈손으로 남루하게 해진 옷을 입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본문에 나오는 다른 비유와 비교해볼 때 한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다른 비유에서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으러가고 여자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러가는데 이 탕자의 비유에서는 집나간 탕자를 아버지는 결코 찾으러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첫째 그 이유는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둘째아들이 아버지께 재산상속을 요청함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의 상속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고, 차자에게는 한 몫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신 21:17).
둘째 아들은 이 법을 근거로 자기의 몫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둘째아들의 태도는 더 이상 방탕할 수 없을 정도로 패륜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로 볼 때 재산상속을 할 시기는 아버지가 정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유언을 통하여 하거나 혹은 법적인 재산분할을 미리 해놓아도 돌아가신 후에 상속받는 것이 관례인데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 자기에게 상속될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유산을 나누어주어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재산을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동의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현찰로 바꾸어 가지고 아버지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떠나 버렸습니다.
아들에게 유산을 주면 그 아들은 재산을 관리할 능력도 없고 또 재산을 팔아서 집을 나갈 것을 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제가 볼때는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재산을 준 것은 재산을 잃더라도 아들과의 사랑의 관계성은 잃지 않고자 했기 때문에 유산을 주었습니다.
돈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성은 파괴되면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수고하고 희생하며 모은 재산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집을 떠나갔고 매우 짧은 시간에 상속받은 재산을 쾌락을 추구하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낭비하고 다 써 버렸습니다(13절). 둘째아들은 마침내 거지가 되었고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농장의 노예가 되어 처참하게 살면서도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비참한 바닥인생이 되었습니다(14∼16절). 친구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여자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지금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본래의 '제 정신을 차리다'(come to himself)는 뜻입니다. 이는 '회개했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그는 그 동안 타락한 본성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입니다. 그는 그때서야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식이 풍족하다는 말은 빵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남아돌아갈 정도로 넉넉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가 겪게 된 모든 어려움을 통해서 그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발견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히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허랑 방탕하게 살며 지은 모든 죄가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자기가 떠나올 때 안타깝게 이름을 부르며 만류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아버지를 슬프시게 한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여기서 일어났다는 말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죽은 자였는데 이제 아버지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일어나서 돌아갔다는 말이 회개의 참 뜻입니다. 회개란 repent 인데 이는 turn again이라는 뜻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당할 수치를 생각하면 도저히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벌어 놓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으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그런 자기를 받아 주실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재산을 나눠주기까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시던 그 아버지의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나서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돌이키기 까지 이를 악물고 참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집을 나간 탕자를 찾으러 가시지 않은 것은 그가 회개할 기회를 갖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의 돌이킴없이 억지로 돌아오는 것은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참회가 없는 사람을 받아만 주는 것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와 함께 돌아설 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날마다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펴보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문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멀리 아들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거지 중에도 상거지 모습으로 둘째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아들이 불쌍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러 번 거듭거듭 입 맞추었다는 뜻입니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줍니다.
아들은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고, 일군의 한사람으로서라도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말도 듣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다 용서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아들이 와서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가 고맙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들 그 자체를 영접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냐? 아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 따지고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그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부터 용서하셨습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본문과 같이 아버지가 용서해 주었을지라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용서를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천천히 하나님께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는 너무나 큰 죄인이어서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있음을 공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또 신을 신겼습니다. 당시 종들은 동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아들만이 신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옷, 가락지, 신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로서 모든 특권을 다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그 살진 송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잡아서 잔치를 베풀 송아지를 준비 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했으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왜 아버지는 아들을 찾으러가지 않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셨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아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아들을 찾아나섰다면 그 아들은 돌아오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설사 찾아나온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왔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참된 사랑은 자식을 겉으로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참된 사랑은 자식의 행동의 변화를 가져 올때에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에서 사랑이 많은 어머니보다는 삶을 변화시키시는 아버지를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잃은 양 비유를 말씀드릴때에 찾기까지 찾아가시는 목자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면서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면 만일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방임으로 이해할 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다른 표현은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는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의 변화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왜 자신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는지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변화입니다.
둘째로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내것이 다 네것이라고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형제끼리 미워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형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형제에 대해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모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 특히 아버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의 뿌리가 형제자매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집을 떠났던 동생이 그 재산을 탕진하고 염치도 없이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야단을 치기는커녕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맏아들은 격분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30절)
맏아들은 지금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29).
또한 동생에 대해서는,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고 합니다(30).
아버지의 마음과 결정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화를 내는 것은 결국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고, 나아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은 지금 아버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아버지의 계획과 결정을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입으로 효도하는 아들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1-32절)
흔히 ‘자식을 낳고서야 비로소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기 전까지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되면 사건과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자식의 눈으로 상황을 보는 것과 부모의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한 불평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말을 보면, 아버지가 공평하게 하려고 한 것과, 아버지는 이 맏아들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오늘 날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산 적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버지의 포도원과 감람 밭에서 일했고 아버지의 양과 염소와 소 떼를 돌보며 살아 왔읍니다. 큰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잡수시는 식탁에서 함께 먹었고 아버지의 누우시는 장막에서 함께 잠을 잤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고단하게 일하실 때 늘 그 곁에서 함께 일했고 아버지가 힘들어 하시고 고민스러워 하실 때에도 늘 그 곁에 있었읍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일어나실 때 함께 일어났고 아버지가 누우실 때 함께 누웠읍니다.
충성된 삶을 살아간 큰아들에 대한 인정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비난을 하자,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당장 부르셔서 회막으로 오라 하시고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말한다. 명백하게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나 주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민 12:6-8, 새)
하나님께서 모세를 좋아하신 이유는 모세는 자신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해서 충성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바람은 40년 걸릴 길을 2주 만에 가기를 원합니다. 반면 모세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2주 걸릴 길을 40년 동안 사막에서 헤매게 만드셨어도 하나님을 여전히 따르고 신뢰하며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좋아하셨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처럼 어떤 일에 대해 비난하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많아도, 모세처럼 묵묵히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좋아하셨습니다.
행한 대로 갚음은 공평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나님의 인자는 당신의 공평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공평은 오직 그분만 잠잠히 바라는 신자의 영혼 속에 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