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죄인사랑 (눅 15:1-7)
우리가 그 사람을 알려면 어떤 사람과 사귀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공부하기 좋아하는 분들과 사귀고 운동하기 좋아하는 분들은 운동하는 분들과 사귑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사귀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종종 식사도 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1) 왔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온 것은 지금까지 그들을 받아주는 종교 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천대받았고 소외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그들을 받아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권위 있는 말씀과 능력으로 그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를 만난 그 사람들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 앞에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더 가까이 다가 왔습니다.
그러자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수군거렸습니다. 수군거렸다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계속적으로 원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누구보다 하나님 편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죄인들과는 다른,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젊은 랍비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자들인 세리와 죄인들 받아들이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너무도 못마땅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없고, 죄인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죄인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내용이 아주 단순합니다.
(눅 15: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들도 양을 잃으면 그 잃은 양을 찾기까지 찾아 다니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의 잃은양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죄인을 찾아다니시는 분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눅 15: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잰틀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인생들에게 거듭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잃은 양 비유에서 그것이 깨어졌습니다. “찾도록 찾아다니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뭐가 답답하셔서...죄인들이 그러실만한 가치가 있나? 비유에서 목자는 양을 잃어버렸을 때에, 그냥 마음 아파하고, 애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를 찾아서 나섰습니다. 그리고 조금 찾다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찾을 때까지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찾아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하늘나라 말씀을 들려주시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가5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2)
사람들이 믿는 세상의 어떤 종교도,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의 어떤 신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찾아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수고해야 합니다. 사람이 뭔가 지극 정성으로 성심을 다했을 때 그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신이 알아주고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넘으려고 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그 담을 예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값으로 죽으심으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이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잃어버린 자를 찾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과 함게 어울리 셨습니다.
죄인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더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에게 다가오셨고, 죄인과 함께 하셨고, 죄인과 식사하셨으며,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데 바로 우리가 그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내기까지 찾으셨고,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비유를 다시 생각하면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하는 작은 잔치가 아닙니다. 친구들을 모으고 이웃들을 초청해서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이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아닙니까? 손해 보는 일 같은데 뭐 하러 이렇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이것은 우리의 계산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의 논리를 가지고 따지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뭐라고, 그 잃은 것을 찾은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이 그렇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이 되는 일입니까? 죄인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거야 말로 손해가 아닙니까? 피조물을 위해서 창조주가 대신 희생을 당하다니,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렇게 무지막지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은 12명의 제자선택과 지도사역에서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하신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든무리를 고치시고 배고픈 무리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천국복받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가치있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별로 찾을 가치가 없는 것은 찾아나서지도 않고, 그래도 좀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찾기는 하다가, 찾기가 어려우면 포기할 것이고, 그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찾을 때까지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면서 나선 것은, 양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을 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찾을 때까지 찾아나섰던 것입니다.
물건은 잃어버렸으면 그 자리에 있지만, 이 양은 가만히 있지를 않고, 헤매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그 양이 이미 늑대 밥이 됐을 수도 있고 한데,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는 수고를 다해서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애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잃어버렸으니까, 일단 그것을 찾고 싶고, 그것을 찾고자 하는 애타하는 마음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에 나오는 목자처럼,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까지 수고하는 그런 모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모습인 것이 분명합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해서,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잃어버렸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 하겠지만, 잃은 영혼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타하는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내 가족 식구 가운데서 잃은 양과 같은 분이 있다면, 그 가족 식구를 볼 때마다 애타하는 마음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죄인을 아끼십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양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가치관, 세상적인 경제 논리로 볼 때는 한 마리보다는 아흔 아홉 마리가 훨씬 더 큽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그렇겠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귀중하고,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귀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기준에서는 1도 99와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비록 그 한 명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명가치는 똑 같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그 생명이 소중하고, 거지라고 해서 그 생명은 덜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분명히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의 눈은 그렇지가 않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우리 역시 사람들을 같은 생명 가치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은 정중하게 대하고, 사귀어 보아야 별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그냥 무시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그 소중한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세상 경제 논리로 계산하면서, 1보다는 99가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과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흔 아홉 명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소중하지만,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잃은 양 한 마리, 하나의 고귀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애타하시고, 그것을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전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랑하실까요? 그것은 인생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왜 죄인을 이렇게 긍휼히 여기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10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도 묘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3절)
자주 경책하지 아니히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절)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10절)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13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절)
계속해서 다윗은 우리의 체질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15절 :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절 : 이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인간의 육체는 풀과 같다 하십니다 1) 풀과 같이 육체의 생명은 짧습니다.
2) 인간은 풀과 같이 미약합니다. 흙에서 난 풀은 밟아도 죽고, 병아리나 토끼 같은 작은 짐승이 뜯어먹어도 죽어 없어지고 맙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는 심히 약합니다.
3) 풀과 같이 비천한 존재입니다.
(시90:5-6)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인생이란 참 짧읍니다. 꽃이 아름답지만 하지만 꽃은 정해진 시간이 있읍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꽃은 시들고 땅에 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잠시뿐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은 시들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느덧 벌써 이만큼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산 날보다는 앞으로 살 날이 훨씬 짧을 것입니다.
욥 또한 우리가 겪는 것을 경험하고 이렇게 말했읍니다.
(욥14:1-2)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고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지금은 영원하게 오래 살 것 같지만 꽃과 같아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 버리기도 하고, 혹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때에 그만 싱싱하던 꽃이 떨어져서 마지막 호흡을 하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죄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 말은 자신의 고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자신에게 쓰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누군가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지만, 누군가는 예수님께 나온 사람을 정죄하며 비난합니다. 죄인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작은 차이 때문에 완전히 다른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함께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습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로 생각했고 배척했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면 자신도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죄인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다시 찾아야하는 잃어버린 자로 보셨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십니까?
우리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주 잊어버립니다. 나는 저기 있는 저 나쁜 사람보다 괜찮기 때문에, 더 잘났기 때문에, 더 의롭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받아주신 것처럼 착각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사랑할려면 내가 죄인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때 주님은 그에게 나를 따르라 그러면 너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중에 한분이 화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화분의 꽃은 빨강색도 희색도 아닌 검정색 꽃이 있는 화분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짙은 감색의 꽃입니다. 그런데 그 화분을 창밖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는데 검정색 꽃을 보면 볼수록 다른 색깔의 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품위를 그 검정꽃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검은 것도 아름답다’라고 하신 말씀이 실감이 났습니다.
유명한 스위스의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가 미국을 방문하던 날, 수많은 기자들은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평생동안 신학을 연구하고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면서 당신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당신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이 때 이 세계의 위대한 신학자는 뜻밖의 너무나도 단순한 말을 해서 기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찬송을 나즉이 읊조립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찬송가 411장)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이것보다 나에게 위대한 발견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