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일주일 설교 요약>
보다 더 중요한 것
(눅 13:10)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눅 13: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눅 13: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눅 13: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눅 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눅 13: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눅 13: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눅 13: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시거나 살아가실 때 말로 표현은 할 수 없는 무언가 매인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이유를 알기도 하고 모르는 가운데 무언가에 매여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로버트 프트남 박사(하버드 대학, 사회학)는 ‘모이지 않는 미국인’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50년 전과의 비교에서 교회, 노조, 사친회, 보이스카우트, 주일학교 등 전통적인 기관들의 모임이 급감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잦은 모임을 ‘사회자본’이라고 하며 민주주의와 이상 사회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모이지 않는 원인은 텔레비전과 컴퓨터 핸드폰 등의 발전으로 집 안에 혹 자기방안에 앉아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혼자 즐김’에서 ‘함께 즐김’으로, ‘나의 행복’에서 ‘모두의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현대인을 감옥에서 해방하는 과제라고 프트남 교수는 주장한다. SNS란 문명의 이기가 오히려 우리를 골방에 묶어두게 만들어 사회소통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해방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지 파악했으면 한다.
1.병든 여인의 겸손과 열망
(눅 13: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18년동안 신체의 아픔때문에 고통당한 여인이 나온다. ‘꼬부라져있다’라고 표현되어있는 병을 앓고 있는데 이 단어는 양쪽끝이 하나로 모여서 완전히 접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양쪽 끝이 완전히 접혀있는 상태로 18년을 보낸 여인이다.
요즈음은 많이 나아졌읍니다만 저도 한때는 허리통증이 심했었다. 허리 디스크가 있는 분들은 이 여인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하실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디스크가 신경을 누르게되면 그 통증이 다리에까지 내려와 고통을 겪게된다. 그러면 잘 걷지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운동도 물론 못한다. 답답한 삶이 시작된다.
그런데 가끔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가우데 18년이라는 세월동안 허리가 완전히 접혀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이 여인은 그 긴 세월동안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했을까? 얼마나 많은 실망과 아픔과 통증을 경험했을까?
그런데 이 여인의 아픔은 육체만이 아니였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의 병의 원인이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했다. 사탄에게 묶여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18년동안 사탄에게 묶인 삶,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오랜 세월동안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러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녀를 고쳐 주셨다. 그녀가 고침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나는 그녀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매였던 것에서 자유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녀는 허리가 접쳐서 펴지못하는 형편이면서도 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여인의 몸 상태를 봐서는 회당에 있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몸을 조금 더 펴지 못하는 여인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정말 궁금하다. 지금처럼 이동수단이 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휠체어가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다.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성경에 나와있지않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회당에 있었다는 것은 이 여인이 하나님과 회당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말씀듣기를 사모하는 열정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한 자신의 육체적 형편에서 이러한 열심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사무엘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기신다고 하셨다. 그녀가 회복의 은혜를 입은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전과 말씀듣기를 사랑하여서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전을 향한 그리고 말씀을 향한 우리의 열정은 어떨가?
어쩔수 없는 상황은 있다 하지만 이 시대가 정말 많은 변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의 전을 향한, 주님의 임재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려고 할때 우리를 가로 막는 요소들이 많은 것 같다. 주님의 전을 향한, 예배를 향한, 말씀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정말 식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구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회복되었으면 싶다.
돌아보면, 교회 모임들, 주일 예배, 어떤 섬김의 자리에 안가고 싶은 이유는 여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을 볼 때 변명이 없는 것 같다. 온 몸이 접혀서 전혀 펴지지도 않는 이런 상황가운데서도 회당에 나와있는 여인을 볼 때 우리들도 다시 한번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어떤 상황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말씀앞에 주님앞에 서게 되는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
둘째로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누가복음 13: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부르시게 된다. 우리성경에서는 ‘불러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으로 보시면 He called her forward 즉 앞으로 나아오게 부르셨다는 것이다. 회당에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을 중단하시고 그 여인을 바라보고 앞으로 불러 내셨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예수님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다가 가셔서 고친 경우들이 많았다. 혹은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도 고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여인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이 왜 이 여인을 불러 내셨는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되는 이 일이 그 여인에게는 얼마나 큰 도전이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꼬부라진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치스러움을 참아야 했고 나의 연약함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말씀에 보면 그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앞으로 나아갔다.
이 모습을 통해서 다시한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신뢰,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주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지만 정말 명확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마음이 저의 삶가운데 선포되어지고 있는데도 우리의 상황, 나의 환경을 이유삼아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정말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두고 순종하기 힘들 때가 있는 것 같다. 그 말씀을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수고와 그 말씀대로 나아가기에는 감당해야 될 너무나 많은 산들이 놓여져 있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들의 모습을 돌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여인은 몸이 접혀서 정말 펴지지 않는 상황가운데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면 자기의 연약함과 수치스러움이 다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가운데로 나아오라고 했을때 다른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닌 예수님만 바라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여 다른 모든 상황들을 뒤로하고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들 앞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그리고 그녀는 회복의 은혜를 받았다. 순종은 회복을 가져오게 만드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은 두가지 경우에 순종한다.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거나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자기생각을 가지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더 옭아매는 잘못된 종교지도자
18년동안 꼬부라져 펴지못하던 여인이 회복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들이 있는반면 오히려 이 기쁜 상황에서 분노하는 자가 있음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 13: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예수님이 그녀를 고쳐 주셨는데도 그 여인이 마치 잘못한 것처럼 말하였다. 왜 이 안식일에 고침을 받으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여자가 잘못한 일, 안식일이 고침을 받은 일을 앞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하지 않게 명령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는 회당의 책임자이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있는 회당에서 척추염 환자가 예수님의 자비로 고침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본문의 회당장은 화를 냈다. 그가 화를 낸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안식일 제도를 보면 그가 화를 내는 부분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그는 안식일 제도를 잘못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출20장 그리고 신명기 5장 이 외에도 사58장에 잘 나와 있다.
(출 20: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리고 그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도 있다.
(사 58: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3)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사 58: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반면에 그 안식일을 어기는 자에게 무서운 경고도 있다.
(출 31: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출 31: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있을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오게 된 이유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말하였다.
(겔 22:8)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그 거룩한 날을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거나 물건을 사거나 팔거나 함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의 근본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주간 일하는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쉼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참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날은 가장 중요한 날이다. 인간이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하루를 보냄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증진시켜야 한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이 천지창조후 쉬셨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루를 온전히 쉬면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보냄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증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의의이다.
그런데 이 회당장이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안식일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안식일을 주신 또다른 의도를 그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 5: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 5: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신 5: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아무일도 하지말라는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출애굽20장에 나오는 안식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의의에 대해서는 다른 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 5: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모세는 그들을 애굽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하루만은 모든 노동을 멈추고 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 개념의 뿌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데에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애굽을 상징하는 사탄으로부터 해방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신명기서의 안식일을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마귀와 억압과 일의 고통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본문 15절부터 예수님의 반론이 이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눅 13: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절)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안식일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교정해야 하셨다. 그래서 어쩌면 안식일 다음날 이 여자를 고칠 수도 있었지만 시빗거리가 되는 걸 감수하고 안식일에 당장 여자를 고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안식일의 본질은 종교의 본질, 즉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것은 해방이다. 18년 동안 사탄에 묶였던 여자를 그 귀신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얽어맸던 모든 조건으로부터 해방시켜 그들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8년 동안 척추염을 앓은 여자처럼 어딘가에 매여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여러분 스스로 알 것이다. 주님은 그분들을 그 억압에서 해방시키시기를 원하신다.
세 번째 우리를 얽어매는 또하나의 굴레, 방종
간혹보면 어떤 교인들은 신앙을 통해서 그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점점 더 구속과 억압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모두 해방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왜 그럴까?
말씀은 양날의 칼과 같다.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면 풍요로운 생명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지만 잘못 오해하면 오히려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더 구속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생활은 참된 해방의 세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길을 가야한다.
그러면 왜 자유와 해방을 얻어야 할 신앙생활에서 억압과 불편을 느끼는가? 그것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오해해서 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고 했다.
(약 2: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느끼게 되지만 말씀과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억압으로 받아들이면 율법이 우리를 오히려 구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교통법규을 나의 유익을 위한 법으로 알고 지키면 우리는 무한히 자유롭지만 만일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속도제한을 어기게 되면 동일한 법이 우리를 오히려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특히 젊은이들은 방종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공부도 하고 싶으면 한고 일도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 삶에도 자유는 있다. 그런데 그런데 주어진 규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아가다보면 점점 삶이 부자유스러워진다.
교톡법규의 속도제한을 지키지 않고 내 마음대로 운전하다보면 경찰이 볼까 긴장하고 사고날까 긴장하며 운전하게 되듯이 불안한 삶을 살게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자기마음대로 살다보면 상사나 동료들로부터 지적을 받게되고 결국은 직장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방종적인 자유는 사람을 더 부자유스러운 삶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주님은 15절에서 화를 내는 그 회당장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하셨다. 즉 그들은 위선자라는 뜻이다. 신앙을 지도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아낄줄 모르는 지도자는 위선자이다. 좋은 지도자가 아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고치시면서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던지 아니면 너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라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병에서 놓임을 받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16절에서는 (눅 13: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하셨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관심은 묶였던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이다.
정말 육체적으로 힘든 자가 고침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사탄에게 묶여있는 자들이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고 또한 방종같은 잘못된 자유에서 벗어나서 말씀과 계명을 지킴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서 ‘곧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의 소원은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을 통하여 그 삶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의 관심을 언제나 영혼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이다. 우리 이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싶은 것은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 교회들이 정말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이 아침이 되길 원한다. 우리 주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처럼 오늘도 교회들의 관심이 영혼이 아닌 사람이 아닌 다른 곳에 있지는 않는가?
내 나귀에게는 물을 먹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당연하지만 오늘도 힘들어하고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서는 우리의 진심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다시 한번 무엇에 집중해야하고 우리 교회가 무엇을 향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자원들을 사용해야되는지 돌아보는 시간되길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혼들을 돌아보고 아파하고 있는 묶여있는 영혼들을 주께서 자유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시길 바란다. 우리 교회는 오늘도 묶여있는 자들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를 내가 먼저 경험하고 나아가 그 자유를 선포해야한다.
기원전 6세기에 파사의 대왕 고레스 라는 현군이 있었다. 처음 그는 메데왕에게 봉사하였으나 후에는 독립하여 이를 복종시켰고 그 후에는 아루메니아,가바도기아,유대, 바벨론, 길리기아, 페니키아 등 에굽을 제외한 당시의 온 세계를 거의 정복한 명군이었다. 그는 또한 바벨론 포로중에 유대인들을 귀국시켜 구약성경에서도 그 이르이 칭송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피정복자에게 극히 관대히 대하고 이를 등용하여 심임하였으므로 대왕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이 고레스 대왕이 어떤 싸움에서 적장과 그 가족을 생포하였다. 이 적장도 이름있는 장수였으나 고레스대왕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포로로 잡힌 적장에게 물었다.
“ 만일 내가 그대에게 자유를 준다면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 나의 소유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대의 아들들에게 자유를 준다면 ?”
“나의 나머지 소유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고레스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대의 아내에게 자유를 준다면?”
적장에게 이제 남은 것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수려하기가 꽃도 무색하리만큼 재색겸비한 현부인이었다. 적장은 자기아내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 만일 대왕께서 그녀에게 자유를 주기로 하신다면 그 대신 나의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과연 지용인덕이 겸비한 명군 고레스는 한참동안 감탄 한 후 말했다. “ 그대의 슬기로운 대답으로 말미암아 무상으로 그대의 몸과 그대의 아내와 그대의 아들들에게 자유를 주겠고 이런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는 행복하리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도 주님처럼 나를 희생하여 주님의 그 자유를 만들어 가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는 죄와 귀신에게 억압당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