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눅 12:49-50)
49)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그 이유를 말씀하신 적이 몇번 계십니다. 이를테면 나는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이나 나는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들은 그 불을 받으셨나요? 물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대로 그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궁금한 것은 왜 성령을 불이라고 묘사하셨나?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불의 특성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의 발견은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불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덕분에 사람은 따뜻하게 살고, 추위를 견뎌 낼 수가 있었어요. 게다가 사나운 맹수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인간의 수명은 자연히 연장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음식을 익혀 먹음으로써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병균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가 있게 됐습니다. 불로 익힌 고기는 소화에도 도움이 됐고, 그 덕분에 건강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두뇌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밝힘으로써 일할 시간을 연장시켜 주었어요. 해만 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간들은 불을 피움으로써 밤에도 간단한 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처럼 불은 인간의 생활양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중세에 와서는 불을 무기로 하는 군사기술이 발달 했습니다. 화약의 발명으로 화학무기가 발달하였고 증기 기관에서 불의 열에너지를 기계에너지로 바꾸므로 산업혁명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불은 근대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에너지가 됐습니다. 이제 불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도움의 영으로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십니다.
불과 관련해서는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11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곳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을 동일한 성령으로 말한 것이 분명하며 다만 불이란 다른 표현을 한가지 덧붙인 것은 우리의 죄를 태우시고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죄를 흔적도 없이 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임하시면 죄악을 태워버리고 사라지게 만듭니다. 또한 불은 불순물을 태워서 깨끗하고 순결한 금속을 만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영혼을 불에 연단된 순결한 금처럼 맑고 순결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옛 성품은 태워버리시고, 새로운 성품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성령의 세례는 실제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이뤄졌습니다. 누가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불의 혀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성령의 능력을 형상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께서 그 곳에 임하셨다는 것과, 그 곳에 모인 성도들을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정결케 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49)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며 성령과 관련하여 답답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두시고 표현하시기를 답답하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은혜가 크고 놀라운데 우리 모든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그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지 못하는 사실을 두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루속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의 복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심으로 답답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임재가 기져다주시는 축복이 얼마나 크고 복된 것인가를 아시기 때문에 그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그런데 왜 주님은 스스로 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야지 이렇게 아비와 자식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분쟁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관계는 지시와 복종의 관계입니다. 또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피로 맺어진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관계로 발전하는 까닭은 성령의 임재가 너무나 좋기 때문에 성령의 임재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아들이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더불어 갈등하게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성령의 임재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있기까지 기다리면서 회개하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행 1: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 승천하실 때 모인 무리는 500명이었으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10일동안 힘써 기도하던 분들은 12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핍박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였습니다. 불같은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뭇 성도에게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불은 타 오롭니다. 불은 퍼져나갑니다. 마가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불은 예루살렘에 모인 3천명, 4천명의 사람들에게 옮겨 붙었습니다.
(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때 사단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사주해서 이 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이 불을 끄려고 온갖 박해의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였습니다. 이 불을 끄려고 베드로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저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행 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그렇지만 누가 하나님의 불을 끄겠는가? 오히려 저들의 박해는 불똥을 세계에 퍼뜨린 격이 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성도들이 사마리아와 안디옥으로 흩어지자 그곳까지 불이 번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급기야 박해자 바울에게 옮겨 붙었습니다.
바울은 꺼지지 않는 불덩어리였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 불이 아시아로, 유럽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불은 그 모진 박해 가운데서도 로마를 복음으로 불살랐습니다. 드디어 주후 313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734년에 요나단 에드워드에 의해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은 방탕과 무질서의 수렁으로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나단 에드워드는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의 불의 역사가 필요한 때임을 믿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성령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 왔습니다. 미국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고 미국사회가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738년에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성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불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웨슬리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불을 뿜는 설교를 하였고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며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웨슬리가 복음을 외치고 지나간 도시마다 음란하고 포악한 사람들이 온순하고 거룩하게 되는 영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성결의 빛이 강하게 임하여 어두움의 세력이 쫓겨 가고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은 정화의 속성이 있습니다. 거룩케 합니다. 불은 받았다고 하는데 인격의 변화와 거룩함이 없다면 다른 불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가장 강력하게 불었던 불의 역사는 영국에서 일어난 웨일스 부흥운동입니다. 이 역사적인 부흥운동은 1904년 이반 로버츠(1878~1951)라는 청년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그 거센 부흥의 진원지는 영국의 웨일스라는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모리아교회였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웨일스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10여 년 전부터 기도로 밤을 새우며, 성령의 이끄심을 경험했습니다. 로버츠는 기도하면서 자주 시대적인 환상을 보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웨일즈는 당시 교회가 침체되어가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영적 부흥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1904년 봄, 어느 날 밤, 로버츠는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나 기도하던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약 4시간 동안 마치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듯 하나님을 대면하는 임재 체험을 했습니다. 이런 신비스러운 경험이 3-4개월 지속됐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지체 없이 순종하여 고향교회로 갔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로버츠는 고향 모리아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어서 도전적이며, 영적인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17명이 회개하고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작은 모리아교회에 떨어진 이 거센 부흥의 불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첫 집회 후 30일 만에 인근에 사람 3만7천명이 하나님께 돌아왔고 5개월 만에 웨일스 전역에서 10만 여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불의 역사입니다.
이 같은 웨일스의 부흥운동은 그 지방의 사회 정화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지역에 강간, 강도, 살인, 주거침입, 공금횡령 등 범죄가 없어졌습니다. 술주정뱅이들은 반으로 줄었고 사생아의 출생률이 44%나 감소하였고 술집과 당구장이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판사들은 재판할 사건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형무소 죄수들에게까지 전도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심리를 중단하고 피고를 위해 기도를 하자 피고인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이런 부흥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를 통한 인격의 변화요, 거룩한 삶, 성결한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보잘 것 없던 한 소년 광부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귀하게 들어 쓰셨습니다. 무명의 한 청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둘째는 말씀연구입니다.
먼저 1517년 중세교회의 이런 부패상을 지켜보고 있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연구를 통하여 면죄부를 파는 것이 성경의 위배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지적하면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걸었습니다.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자 다른 나라에서도 종교개혁자들이 일어섰습니다. 장로교 창시자인 존 칼뱅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제네바 시가 거룩한 도시로 성화되었습니다. 칼뱅에 의한 제네바 성시화 운동은 대 성공을 거두어 한때 죄수가 없어서 교도소마다 백기(白旗)를 내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회개입니다.
미국인 존스톤(H. A. Johnston)목사는 1906년 웨일즈에 들려 그곳에서 일어난 부흥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고 한국에 들어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증언하였습니다.
이 증거가 바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4개 장로교 선교회 연합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새벽에 경건의 시간, 오전에 30분 찬양, 3시간 성경공부, 오후에는 노방전도 그리고 저녁은 전도 집회로 진행하는 두 주간 사경회에 800-1000명이 운집했습니다. 4백리 밖에서도 걸어서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경회가 처음에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은혜도 없이 몇 날이 지나갔습니다.
바로 그때 길선주 장로가 교우들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성도님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저는 도둑질을 했습니다.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사람이 임종을 하면서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사취했습니다. 나는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을 당장 그 미망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길 장로가 이렇게 회개하자 그렇게 분위기를 가라앉게 억눌렀던 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죄를 내어놓고 통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집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이와 같은 회개가 잇따르자 주님께서 장대현교회에 성령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놀라운 부흥이 일어납니다. 이 불길이 전국교회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성령의 불을 던지기 위하여 오셨고 지금 이 불이 붙지 않아 너무 답답해하십니다. 우리교회에 이 불이 다시 불붙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교회가 부흥의 불씨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뜨겁게 통성기도도 하고 부흥을 사모하는데 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가? 죄악을 끊는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는 것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불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은 힘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무슨 힘인가?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힘입니다. 기도가 되게 하고 전도가 되게 하는 성령의 힘입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이 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이번에 개최하는 부흥회에 이 불을 던져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교회에 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은혜를 사모하며 열심히 참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