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전 4:1-12)
오늘 본문 말씀은 잘못된 종말관 때문에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훈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을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려면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로 어우러져 춤을 추게 될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호흡을 맞춤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히 11:5-6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시 69:30-31 말씀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다윗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중요한 이유는 ‘찬양과 감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호흡을 맞추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롬 14:18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니라”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하나님께 호흡을 맞출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호흡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호흡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섬김으로 하나님께 호흡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마치 주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야 할 내용으로 거룩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
본문 4: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세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광범위한 헬라 문화권 성적인 타락상은 그 도를 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부부관계 이외에서 성적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할 경우 아내와 이혼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심지어 신전에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의식 중에 음란한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그리스도인이 되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음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세워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거룩함이 무너진 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함이 무너진채 뜨겁게 찬양한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거룩함이 없으면서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명령들 중에 왜 하필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고 또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곧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초청장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려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려면 우리가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자주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해주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데 우리가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집에 손님을 모실려면 대게 집안청소를 합니다. 그와같이 하나님을 우리마음에 모실려면 마음의 청소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은 거룩한 곳에 임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거룩함을 향한 결심과 노력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곳이 시내 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옷을 빨라고 하셨습니다. 또 몸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옷을 빨 물이 어디 충분하게 있겠습니까? 또 빨아봐야 얼마나 깨끗해 지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몸을 씻어봐야 얼마나 깨끗해지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적어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애를 써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머리로만 하지 말고, 실제 몸을 사용하여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곳에 주님이 임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열 명의 처녀가 있는데 다섯 명은 기름을 준비했고 나머지 다섯 명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명의 처녀가 천국잔치에 들어간 것은 다섯명의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는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이 땅에서는 예수님 같이 완전히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애쓰는 겁니다.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거룩함과 경건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연약한 나를 강하게 만드는 힘, 우둔한 나를 슬기롭게 만드는 지혜가 거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할 때 가장 강하신 하나님,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합니까?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한 곳에서 나타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능력을 나타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거룩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모세가 죽고 그 다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그 여리고 성에서의 승리는 전략이 좋아서도 아니고, 무기가 좋아서도 아니고, 오직 거룩함의 승리였습니다.
사실 여리고 성 앞에 선 이스라엘은 좋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이길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좋은 무기도 없었고, 어떤 탁월한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셔서 군사들이 아프고 컨디션도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이길 수 있는 조건이 정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겼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우직하게, 고지식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쟁을 하기 전에 군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또 전쟁을 하는데 나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성 주위를 하루에 한 바퀴 돌라고 하시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나서 “와” 하고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싸우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이긴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할례를 행했고, 믿음으로 절기를 지켰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성 주변을 돌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거룩하면 얼마나 거룩하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봐주시는 겁니다. 그 거룩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직접 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함이 사라진 곳에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집니다. 여리고 성의 승리의 기쁨이 아직 가시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어이없는 패배를 당합니다. 여리고에 비하면 쉬운 상대인 아이 성에서 쓴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룩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범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약해서 진게 아닙니다. 전략이 안 좋았던 게 아닙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 비하면 아이성은 조그만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패배했습니다. 왜? 거룩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사라진 곳에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집니다.
세상의 높은 사람은 돈 주면 움직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을 위해 움직이십니다. 세상의 높은 사람은 뇌물을 좋아하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 거룩한 한 사람을 위해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