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막11:20 -25
우리는 몇주전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사건을 보았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그 당시 이스라엘, 특히 그 종교 지도자들의 형식적인 삶, 위선적인 삶을 비유해서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리스천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맺는 삶을 말씀하시면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2-25절)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려면
첫째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약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마 14:28-31에서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면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래서 주님이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면 바람의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내 영혼도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했다면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걷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람을 맞을 때 의심이 생겼습니다. 의심을 방치하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다가 빠집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실제로 어떤 문제가 너무 힘들어서 우리가 세상의 바다에 빠지고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문제가 진짜 어려워서 우리가 망가지는 게 아닙니다. 먼저는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결정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을 보게 되면 두려워집니다. 두렵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이겨낼 수 있는데, 두려워하게 되면 문제에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풍랑 위에 서 계신 주님, 문제 위에 서 계신 주님, 나의 모든 문제보다 크신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쓰신 방법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와서 아들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재산은 점점 많아지는데 상속할 아들이 없으니까 걱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들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약속을 안 해주세요. 아들이 없어요.
그래서 하루는 기도할 때 하나님 좋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안주시니까 우리 집에서 기른 종을 양자로 삼아서 상속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아니라 네 아들에게 상속을 삼아야 한다.
그러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하기를 네가 장차 저 하늘에 별들과 같이 많은 자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그 마음속에 하늘의 별들을 마음에 그리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별들과 같이 많은 아들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기도하기 때문에 의심하지않고 기다릴 수가 있었습니다. 100살이 되어서 이삭을 낳고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 분명히 이루어진 것을 마음에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가족들이 회개하고 교회 나올 것을 기도를 했다면 그 가족들이 교회 나와서 함께 예배보는 그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미 현실화된 모습을 마음속에 소유해야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둘째로 받은 줄로 믿고 그것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포기하지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18절 말씀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까지 간절히 기도하자,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 하늘이 캄캄해지고 큰 소낙비가 내렸습니다(왕상 18:41∼46).
이처럼 엘리야 선지자는 기도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하고, 다시 기도하여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늘을 움직이는 ‘기도의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엘리야와 같이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 18:41∼42)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겸손의 표현이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니,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비가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약속의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기 위해, 감람산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사람은 모두 무릎 꿇고 기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신 9:25).
다윗 왕(삼하 12:16)도, 솔로몬 왕(왕상 8:54)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사(왕하 4:34)도, 에스라(스 9:5)도, 다니엘(단 6:10)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막 5:22∼23).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아버지도,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했다고 했습니다(마 17:13).
스데반(행 7:60)도, 사도 베드로(행 9:40)도, 사도 바울(행 20:9∼10)도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왕상 18:43)
그는 한두 번 해 보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서너 번 해 보고 주저앉은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승리합니다(출 17:11∼13). 기적을 체험합니다.(왕상 18:42∼45). 형통하게 됩니다(느 1:4, 11). 응답을 받습니다(시 40:1). 병이 낫게 됩니다(마 20:30∼34). 소원이 이루어집니다(막 7:26∼29).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눅 18:3∼7). 그러므로 끝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구름이 점점 커지더니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곧 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릎 꿇고 간구하는 기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1:1-18에 보면 한나라는 여성이 나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홀로 성소에 들어가 입의 소리는 내지 않은 채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성소 문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눈시울이 붉어지고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술 취한 줄 알고 술을 끊으라고 책망했습니다. 한나는 그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심정을 통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엘리는 한나의 본심을 알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빌어 줄 수 있는 축복의 말을 한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엘리 제사장에게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얼굴에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축원을 듣고 그는 기도하고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나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는 확실한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없었고 계시도 없었고 표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안을 찾았고 응답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어떻게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제사장 엘리 때문입니다. 아마도 엘리와 상담할 때 그 마음속에 응답의 확신을 가진 것 같습니다.
상처를 상담 분야에서는 life shock 삶에서 받은 충격이라고 합니다. 상처란 삶에서 받는 충격으로 인한 고통이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았든지 사회적 구조나 통념 등 환경 때문에 상처를 받았든지 자기 내면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받았든지 그 상처는 마음에 고통을 가져옵니다. 울분과 분노와 증오로 계속적인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내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발산시켜야 합니다.
상담 분야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 중 ‘카타르시스용법’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상담사의 경청이나 질문이나 행동의 도움을 받아 내면에 있는 상처를 밖으로 발산하는 정신요법입니다. 상담사의 도움으로 내면의 상처를 말하면서 울거나 고함치거나 때리거나 하면서 울분이 발산되어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일정부분 효과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상담사를 찾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도 상처를 받아 마음이 괴로우면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가장 친한 사람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찾아 자기 속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상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공감하거나 경청해주지 않습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므로 오히려 부담이 되게 합니다. 또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진지하게 그 아픔을 들어준다면 그는 치료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한나의 아픔을 들었고 그리고 축원해 주었습니다. 그때 한나의 아픔은 치료되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응답을 믿었고 그는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안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