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1-19
한달전 주희자매가 다녀 갔습니다. 군인으로 있을 때 소탈하고 성실하였는데 다녀갈 일이 있어 교회에 오면서 땅콩캔을 사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종종 이곳에 있다가 떠나가는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하였는데 떠나간 뒤 소식을 보내오는 이들은 많지 않았는데 주희자매가 다녀가면서 감사표시를 한 것이 제게는 고맙게 여겨 졌습니다.
오늘 성경애도 이와 비슷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촌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을은 우리나라 소록도와 같이 나병환자들이 함께 기거하고 있는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그 사회에서 추방되기 때문에 따로 떨어진 외딴 곳에서 살 수 밖에 없었는데 혼자서 살 수 없으니 나환자들이 서로 모여서 함께 살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기들이 있는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레위기에 보면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다고 해서 그냥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바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이 온전케 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성경에 있는 대로 그 사람의 몸을 검사하고 “이 사람은 나았다”고 판정을 해 줄 때 비로소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그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나아가다가 기적적으로 그들이 병고침을 받고 나병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론가 들 가버리고 그 중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였습니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 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첫째는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은혜를 입으면 감사할 것 같지만 정작 병에서 나은 환자중 감사한 사람은 10사람 중에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여러분 마음속에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아, 나에게 아직도 타락한 죄성이 남아있구나!” 생각하면 맞습니다.
여러분,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럼에도 아홉 사람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아마도 대단히 섭섭하셨던 것 같습니다.
열 명을 낫게 해주었으면 열 명이 다 나와서 예수님께 감사해야 할텐데 모두가 다 나았으면서도 모두가 다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중에 딱 한 사람만이 나와 감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홉 명이 왜 예수님께 안나왔을까요?
아마도 그들이 병이 낫자 너무 기뻐서 그동안 헤어져 있었던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이 얼른 거려서 고향으로 발걸음을 먼저 옮긴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고쳐주신 예수님도 고마웠지만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아서 좋긴 좋은데 그리고 감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자기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사례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면서 뭐가 좀 생겨야 감사하겠다 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말고 조금 있다가 하자!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때 시간도 그렇고 재정적인 여유가 있을 때 바로 그때 감사하자! 미뤄 놓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은혜를 느끼는 강도가 식어져서 마침내 감사를 잊어버렸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다보면 그 사람은 평생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21 세기 악마는 그렇게 역사합니다. 감사신앙을 뿌리채 뽑으려고 하기보다는 성도들에게 다가가서 꼭 오늘 지금 당장 감사해야 하나? 조금만 미루어서 뭐가 좀 생기면 나중에 더 잘하면 어때! 하면서 매혹적인 제의를 하고 나중에는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뜨거웠을 때 즉시 해야 합니다. 감사를 나중으로 미루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즉시 감사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병나은 아홉사람을 찾은 까닭은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눅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구원받아 천국가고 행복해지고 즐겁게 하고 복을 받으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학생이나 직장인이나 주부나 모든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고전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도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삶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많은 이적을 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했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나병에서 고침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나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홉명은 그들의 병이 나았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아홉 명은 아마 그 마음에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의가 있으면 별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혹은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실 만큼 부르짖었지 않았느냐?”
혹은 우리가 그동안 고생할 만큼 고생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시에는 나병이 낫지않지만 내가 예수님 말씀을 믿고 갔었지 않았느냐?”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은혜 받을 자격이 있지않느냐?” 그런 마음이 있을 때 감사가 우러나오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는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자였는가? 얼마나 비천한 자였는가? 그런데 주님의 긍휼로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는 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비천함을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깊이 감사합니다. 겸손의 깊이와 감사의 높이는 비례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 의를 주장했다면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4-6).
그러나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런 것들을 결코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치 못할 자였습니다(고전15:9). 비방자요, 박해자, 폭행자, 죄인 중에 괴수임을 잊지 않았습니다(딤전1:13-15).
이런 그를 하나님이 치셔서 목이 부러져 죽어도 할 말이 없는데 죄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사도로까지 택해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고전15:10). 이처럼 자신의 부족함과 비천함, 죄인 됨을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받은바 은혜를 알고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50:23절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가 넘치는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주님이 아홉은 어디있느냐라고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세째로 감사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질 들어가지, 시간 들어가지,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에 인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자에게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육신의 질병만 낫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구원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영원토록 보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평생을 보장해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는 단지 감사를 표현하러 왔는데 예수님은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셨을 때 그들이 괘씸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병이 낫는 축복뿐 아니라 구원이라는 더 큰 축복을 주실려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감사는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까?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그것이 성공의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해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감사합니다”는 말을 자주하면 마음이 유쾌해집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은혜가 흘러 들어옵니다. 놀라운 평강을 얻게 되며, 나도 모르게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갑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건강해집니다. 감사하면 마음이 편하고,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감사하면 사랑과 능력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내 마음과 얼굴이 밝아지니 좋은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오게 됩니다. 감사하면 솔로몬처럼 물질적인 복도 받습니다. 돈이 생깁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4:18)
그렇다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건강하지 않을 때도, 일이 풀리지 않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범사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보이는 불평이 나오는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주어진 일이라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할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가득한 불평과 미움과 좌절과 분한 마음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되고 우리는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 성령충만한 신앙은 감사충만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은 풍성한 삶을 살며, 행복이 넘치는 인생이 되도록 프로그램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때 이런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