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맞설려면 (막 10:32-34)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9:22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격려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에 고난이 예상될 때 어떻게 하면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고난의 이유를 알면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뿐만아니라 고난의 이유도 아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과 7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배신과 억울함과 수치와 모욕이 있고 고난과 죽음이 있는 길을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 길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었고 우리자녀들을 살리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수치와 모욕의 길이요, 배신의 길이요 ,무엇보다 십자가의 죽음의 길이지만, 불구하고 기꺼이 올라가시는 이유는 오직 우리들과 우리 자녀들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유는 이제 모든 공생애를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우리도 고난이 예상될 때 또는 고난을 당할 때 그 이유를 알면 훨씬 고난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예상될 때 고난의 이유를 한 번 묵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여야 합니다.
인자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고난과 부활을 앞당겨 말씀하여 주셨듯이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우리를 격려하시고 살리기 위하여 반드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고난과 잘 맞설 수 있기 위해서는
둘째로 고난의 결과를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고난의 결과를 아셨습니다. 부활입니다. 주님은 고난 이후를 보셨던 것입니다.
(막 10: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우리도 우리의 부활을 묵상할 때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묵상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과 기쁨과 환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걸음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도 나를 가두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삼 일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이다! “
고통을 받는 시간들은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기간일 뿐입니다.
마가복음 10:33-34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어떤 말씀이 더 귀에 잘 들어오시나요? “죽이기로, 넘겨주고, 능욕, 침, 채찍질, 죽음. 그리고 부활. ...죽음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들리면, 우리는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즐겁지 않은 길이 되어 버립니다. 고통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아파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누가 제자들의 인생의 키를 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어떤 가요? 우울하신가요? 힘드세요? 그래서 죽을 것 같으세요? 그런 생각이 우리를 지배할 때마다, 우리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NO! 아니야!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빨리 삼 일후에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도록 하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는 설렘을 보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셋째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요 16장에서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께로 가겠고 너희는 유대교에서 출교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졌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시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함께 계신 것과 같으며, 더 큰 역사도 행하실 것이기에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은 너희가 두려워하지만 성령님이 오면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난 다음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떤 핍박과 환난이 와도 성령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환난 중에도 기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요한복음 16:21~22에서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습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 분명히 해산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때는 남편도 미워 죽겠다고 할 정도로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모가 고통스러워할 때 산모 주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중환자실 분위기입니까? 아닙니다. 산모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아기를 기다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요! 좀 참아요! 이제 곧 애기가 나올 거예요!”
분명히 산모는 지금 죽겠다고 하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기를 낳고 나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산모도 아기를 안는 순간, 해산의 모든 고통을 다 잊고 아기를 기쁨으로 안습니다. 아기를 받아들고는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교인들을 보니까 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얼굴이 우중충했습니다. 찬송도 기도도 힘이 없고 생명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바로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요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십자가 복음과 성령님에 대하여 설교하고 교인들을 붙들고 간절히 안수 기도를 했을 때 모두 성령을 받아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중의 하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사람이 노력하고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습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의 결과가 기쁨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심령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님께 기쁨을 구하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여러분의 앞날에 예상되는 고난만을 보지 마십시오. 고난이후를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이유를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