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 71:3)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시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직장에서 버림받을까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심해지면 하나의 정신적인 질병이 됩니다. 소위 ‘경계선상의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입니다. 버림받음을 상상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는 성격장애를 말합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깊은 우울을 겪습니다. 이들은 유기공포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 심한 공허감을 느낍니다.
대인관계에서도 경계선상의 성격장애란 병명에서 표현된 ‘경계선’이라는 말처럼, 극히 변덕스럽고 극단적입니다. 타인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며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친구나 연인을 사귈 때 급격히 가까워지며 극단적인 친밀감을 갖다가도 어떤 시기에는 상대에게 극단적으로 냉담해지는 식입니다.
이 병의 원인이 어렸을 때 학대와 방임을 당했는데 있다고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던 버림받음은 인간을 정말 두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다른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지 않았을까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지쳐있는데 하나님마저도 자기 곁에 계시지 않은 것 같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지 않았을까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도 이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시 22:1-2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 같아 괴로워 절규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도 다윗을 저자로 보는데 그는 9절과 18절에 반복하여 “내가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마시며 내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하며 ‘버리지 마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버림받는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고 또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물론이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도 하나님께 버림받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견디기 힘 드는 것은 불행 그 자체가 아닙니다. 고통 그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고통은 참을 만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무관심하신 것 같이 느껴지면 참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불행이 깊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평강주시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이 극심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 않으신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 41: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도 사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버리실 수 없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느끼는 영적인 혼란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자기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사울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사울은 이스라엘 최초의 왕입니다.
삼상 13장을 보면 블레셋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도 두려워 떨며 도망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겨우 군사가 600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백성의 동요를 막기 위해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제사를 자기가 집행합니다.
이 일이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삼상 13:13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셨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에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겸손하던 사울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던 사울이 제사장이 아니면서 제 멋대로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내가 왕이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교만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가 마음으로 벌써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삼상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사울에게 보내셔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래도 다시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었습니다. 사울은 대군을 이끌고 아말렉을 공격했습니다. 결과는 대승이었습니다. 아말렉의 왕인 아각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말렉 족속의 남녀노소를 진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말렉의 가축 중 쓸모없고 형편없는 것들 모두를 다 진멸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가축을 모두 진멸하라 명하셨는데 사울은 아말렉 가축 중 좋은 것 기름진 것들을 감추어 놓았던 것입니다.
삼상 10-1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사울이 또 다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5:23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잘못때문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책임을 백성에게 전가하였습니다. 변명했던 것입니다.
(삼상 15:20)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릴 수 있습니다.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나면 진정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를 범했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겁게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귀히 쓰임 받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버렸다는 말은 '포기해 버렸다, 단념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버려두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죄에 빠진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중의 한가지는 버리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 병에 걸린다든지, 사업이 무너진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 형태의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두는 심판도 있습니다.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버림받은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이제는 내 맘 대로다'라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심판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구 말립니다. 꾸중도 하고 달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맘대로 해라" 포기해 버립니다. 이때 아이는 "이제 내 맘 대로다. 자유다" 하며 뛰쳐나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그 순간부터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그 때부터 방종과 탈선과 죄 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에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하라"고 하자, 가롯 유다는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나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재판소에 찔림을 받아 목을 매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인간은 마귀가 조종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온갖 더러운 타락의 열매를 맺게 하여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시켜버립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는 간음죄도 범하고 살인죄도 지은 사람이었으나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년에 대한 말씀(대상29:28)을 보면 그가 나이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첫째 그는 자신의 군사력보다도 하나님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 71:9)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다윗의 말년에 믿었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당하였고 그래서 아마 자식도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함께 하시면 그는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71:7)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피난처라는 것은 큰 환난이 다가오는데 그것을 피해서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전반적인 환경에서 공격을 받고 고통을 겪게 될 때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마음에 알고 그렇게 바라보고 믿고 외치면 환난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3절“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으면 밤에 찾아오는 공포, 한밤중에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공포, 낮에 계획적으로 싸워서 적이 화살을 쏘아서 가슴에 날라오는 화살,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 빌딩이 무너지든지 다리가 무너지는 재앙,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피할 곳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살면서 피난처가 내게 있는 것은 굉장히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 올무에서 피하게 해주시고 극한 전염병에서 피하게 해주십니다.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의 환난을 보면 집이 무너지지 애들이 다 무너진 집더미 속에 깔려서 죽지, 마누라가 욕을 하고 나가지, 몸은 병들어서 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지, 환난이 엄청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시인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시편 121편 5절로 6절에 “야훼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야훼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기독교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성경말씀이 하나님이 그 속에 들어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말씀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상상하면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이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둘째 그는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탈무드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노인은 언제부터 노인인가? 내가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노인이다." 노화와 늙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노화는 생리적 현상이고 늙는다는 것은 정신적 현상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노화됩니다. 그러나 늙고 안 늙는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나이 어린 애 늙은이도 있고 나이 많은 이팔 청춘도 있습니다. 꿈이 없으면 늙은이입니다.
요엘서 2:28에는 하나님의 영을 부으셔서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볼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마귀는 우리를 과거에 머무르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꿈꾸게 합니다.
다윗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기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에 안 걸려 건강하게 해주고, 자식에게 부담을 안 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도록 해주며, 죽을 때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고 또 거동에 불편이 없을 때에 큰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자식들이 출세하여 번듯하게 자리 잡도록 해주며 그래서 자주 자기를 찾아오는 효성스런 자녀가 되어달라고도 전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백수가(백발) 되어도 주를 전하겠으니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준 신자를 버릴 리도, 기자 또한 그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리는 없습니다. 그는 아무리 육신이 늙더라도 주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고 또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늙어 가면 현장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끝납니다. 또 현실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일도 종료됩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의 자신이 감당했던 한 세대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 말년을 안락하고도 남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신자는 반드시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삭의 하나님으로, 이삭의 여호와가 야곱의 여호와가 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다가오는 세대에게 믿음이라는 귀중한 유산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머물게 하신 목적입니다.
노년이 되면 육신적 능력이 떨어져 사회 활동을 할 시간이 줄고 반대로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늘게 됩니다. 불신자는 그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는 것에만 목표를 두지만 신자는 하나님을 더 묵상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비슷하게 닮아갈 수 있는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젊었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미처 모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노인은 젊은이보다 하나님과 씨름하며 보낸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생생한 체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실패를 겪고 있는 젊은이에게 경고와 위로기 되게 전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 영혼을 주신 뿐께로 다시 돌려드리도록 부름을 받는 순간까지 젊은이들을 만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거동이 불편해 젊은이들을 만날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때는 젊은이들을 붙들고 기도라도 할 수 있습니다. 세대차가 커서 서로 사고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전도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보다 젊은 자가 됩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모든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영원한 멸망 대신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노화(老化)는 불신자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정리해야할 시기이지만 신자는 오히려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주위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하나님과의 사이가 더 가까워지기에 노년기만큼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증거 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없습니다.
갈렙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40년의 광야생활을 할 때 모세를 따라 여호수아와 함께 백성을 이끌던 사람이었습니다.
40년 광야를 돌고돌아 가나안에 이른 이스라엘은 파죽지세로 가나안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으로 부터 남쪽, 그리고 북쪽까지 거의 대부분의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가 정복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헤브론으로 높은 산악지역에 위치한데다 호전적인 여부스 족속이 버티고 있어서 쉽게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브론 정복은 여호수아에게 큰 부담이 되고 민족에게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 때 85세의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취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민족의 어려움 앞에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평소 받았던 감동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이 헤브론을 향하여 꿈을 선포했을 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85세면 쉴 나이입니다.
언제나 꿈은 이런 한계상황에서 시작됩니다. 상황이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꿈이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꿈은 상상력을 품게 하고 열정의 꽃을 피우게 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꿈꾸지 못할 이유가 됩니까?
갈렙은 에서의 후예인 에돔 족속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고, 광야에 이스라엘 민족의 뒤통수를 치며 괴롭혔던 민족, 훗날 페르시아에서 유대인을 괴롭힌 하만이 에돔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 시대 2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악명높은 헤롯대왕이 에돔 사람입니다. 이 정도라면 갈렙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는 그만두고 아예 꿈을 포기해야 합니다.
늘 우리의 꿈을 막는것이 우리의 과거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살인자였고,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마틴 루터는 교회에서 파문당했고, 칼빈은 프랑스에서 종교개혁하다가 실패하여 스위스로 야반도주한 사람입니다. 모든 성자에게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과거실수는 받아들이나 실패는 거절합니다.
실수는 내가 잘못한 것이고 실패는 잘못한채로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실패는 있어도 영원한 실패는 없습니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실패를 두려워 말고 계속 도전하여야 합니다.
(시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은 우리가 늙었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다윗의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