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감 극복
(요 21: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후회란 했던 일이나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말싸움을 할 때 했던 어떤 말을 후회할 수도 있고, 어떤 직장에 다닐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 배우자와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뮨제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 때문에 그 일을 하루 종일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패배감에 젖어 있게 되면 후회와 함께 불안감이 커집니다. 희망을 잃게 됩니다. 만성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결국 건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 과거의 잘못을 생산적으로 반응하면 오히려 그 과거의 경험의 자신의 삶에 축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었나를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 지난 주에 왜 아이에게 화를 내고 큰소리를 질렀을까?"라고 생각을 한다고 합시다. 이 때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에 대한 답은 "일 하고 와서 지친 상태라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랬으니 다음에는 아이들을 상대하기 전에 5분 정도 쉬도록 하자"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후회는 미래에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읍니다.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끼치는 영향은 선택할 수는 있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로 제자들을 찾아오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잡히시고 난 후 그들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무서워서 도망가고 문을 닫고 꽁꽁 숨어지내거나 혹은 고향으로 피신하는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우님들이 교회를 나오시지 못하면서 믿음이 식어지는 것 같다고 염려하십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영성회복의 지혜를 얻었으면 합니다.
첫째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신 일은 베드로의 주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요 21: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비록 연약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는 배반자가 되기는 했어도 그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패에서 회복할려면 내게 사라진 것들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게 남아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술가', '긍정적 사고'의 창시자'인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목사님은 '세계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실의에 빠진 듯 힘이 다 빠져 있는 그는 말했습니다.
"전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사업이 부도나면서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적으면서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셨다고요? 그럼 부인은 있습니까?"
"네,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아내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종이에 '훌륭한 아내'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중년 남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자녀들은 있습니까?"
"네, 저만 보면 함박웃음을 짓는 착하고 귀여운 세 아이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종이에 '착하고 귀여운 세 아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소중한 친구는 있습니까?"
"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의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는 종이에 '좋은 친구들'이라고 적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건강은 어떤가요?"
"건강은 자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편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중년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제게는 아직 귀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네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실패하셨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있습니까? 그러면 기회가 아직 있다는 의미입니다.
건강이 있습니까? 훌륭한 자산이 남아있네요.
믿음이 있습니까? 그보다 더 큰 자산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비록 부끄럽게도 실패는 하였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남에게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질문하셨을까요?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에게 남아있는 귀중한 것을 깨닫게 하기위해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만하면 얼마든지 우리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실패한 까닭은 사실 주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주님이 왕이 되시면 그 아래서 한자리씩 차지할 것이라고 하는 세상 영광을 더 사랑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세상영광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회복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과 기도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시면 영성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즈음 일주일에 네차례 제가 제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우들에게 간단히 문자로 써서 보내 드립니다. 현장예배는 없어도 문자를 통해서라도 자주 교우님들과 교제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혹 교인들이 귀찮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는데 한 집사님이 그 말씀들을 통하여 힘을 얻었다고 하셔서 용기를 내어 계속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주간은 어떤 자매님이 자기도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생명의 삶 강의 시간에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왜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도 죄를 계속 짓는 쪽으로 편할까요? 그게 악의 세력이 커서 그런가요?’
저는 그것은 습관의 문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짓는 일이 습관이 되었고 그래서 죄를 짓는 삶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삶이 내게 편하게 느껴질려면 새로운 삶이 내게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의 습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지름길은 없습니다. 새로운 삶이 편하게 느껴질때까지 반복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
질문한 자매님은 로버트 그린의 ‘인간본성의 법칙’ 인문학 책을 읽고 느낀 느낌을 덧붙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자아, 저차원적자아와 고차원적자아가 존재한다. 고차원적 자아는 우리가 스스로를 자각하며 사려 깊은 행동을 하게 만들지만 고차원적 충동은 저차원적 충동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고차원적 자아와 교감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통찰이 필요하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저차원적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서 30년을 살았으니 당연히 저차원적으로 생각하는게 편할 수 밖에 없지만, 앞으로 새로운 30년뒤에는 고차원적 자아가 많이 형성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하는게 훨씬 편한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라고 자매님은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한가지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어도 그 습관이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좀 편하다는 것이지 그 습관이 우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낙심하고 두려움에 빠졌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하신 육신을 보여 주셨지만 그 본것만 가지고는 안되시기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게되고” 권능을 받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은 어떻게 경험합니까?
주님께서 부할하셨을때에 주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는 주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하고 주님과 3년간 동거동락하면서 많은 사랑의 추억이 스며들어 있는 지역입니다. 말하건대 예루살렘은 시험의 장소였다면 갈릴리는 사역의 장소, 추억의 장소, 양육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추억의 장소에서 그들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간혹 부부들의 사랑이 식어질 때에 과거 뜨거웠던 사랑의 기억이 있는 추억의 장소를 방문하다보면 다시 회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패배감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물론 현장예배라는 교회예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반드시 교회라는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골방에서라도 우리가 주님과 마주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 앞에 내 마음을 토하여 내어 놓을 때에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주님앞에 앉아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아뢰이다보면 분명 주님의 임재와 평강을 경험하게 되리라 여겨 집니다. 그래서 코로나로 인한 어려운 시간들이 오히려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사랑의 추억만들기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둘째로 하신 일은 기대를 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요 21: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남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계속 부탁하신 것은 양을 먹이고, 양을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직도 기대를 걸고 계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가 훌륭한 목자가 되어서 성도들을 먹이고 돌볼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걸고 그에게 양떼를 부탁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있다고 여겨질 때에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한번은 저희 누님이 제가 이런 문자를 보내었습니다.
“ 동생은 참 훌륭해” 저는 누님이 무엇을 보고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좀 쑥스럽기도 하고해서 제가 답장하기를 “아닙니다. 누님이 오히려 훌륭하시죠”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누님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스스로 많이 조심하게 되더라는 사실입니다. 더 노력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동일하십니다. 제가 금요일날 나눈 말씀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으로부터 늘 위협받는 상황에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양자택일의 교차지점에서 언제나 살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 상황중에도 스스로 낙망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은혜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27: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기보다는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죽겠지만 그런데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뜻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것이란 싸인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대로 다윗이 ‘늙도록 부하고 건강하게’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뱉는 말대로,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십니다.
오늘도 내가 죽지않고 살아있음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은혜를 기대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섬김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기대를 걸며 부탁하신 일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 일에 실패한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면 한자리씩 차지하겠다는 ‘섬김받으려는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후 그들은 그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깨달았고 주님의 부탁대로 양떼를 섬기는 사명의 삶을 살아감으로 그들은 온전히 회복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침체에 빠진 분들에게 한가지 권면하고 싶은 것은 현 상황가운데서라도 “할 일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재택근무를 할찌라도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즐거보는 다큐가운데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거기에 출연하는 주인공은 대부분이 삶의 실패자들입니다. 건강이 나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사람들이거나 혹은 거친 세파에 시달려 도무지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찾아 들어온 처절한 인생 실패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방문한 프로담당자가 그들과 상담하는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오는 자연인들의 대답은 지금 그들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건강이 좋아져 행복하거나 산상생활이 자신에게 맞아서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현재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들은 가족과 이웃을 떠나서 아무도 살지않는 깊은 산속에서 너무나 외로울 것 같은데 무엇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철저한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건강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이상 자기자신을 의지하고 살아갈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깊은 절망이 과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산속에서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는 그래서 스트레스없이 충분히 쉬면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몸에 좋은 산나물이나 중독되지 않은 신선한 채소와 약초를 먹으며 몸과 마음이 회복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건강하였고 혼자 살아가는 삶이지만 외로워하지 않고 행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다큐를 보면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까지 산속에만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인생은 한번뿐인데 언제까지 산속에서 그렇게 살 수 밖에는 없지않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베드로같은 패배자는 아닐찌라도 영성의 회복을 바라신다면 그 비결은 두가지입니다.
한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제한된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찌라도 골방에 들어가 신선한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리고 주님과의 은밀한 기도의 교제를 나눔으로서 영적인 자연인이 되셔서 성령충만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주님의 양들을 먹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비록 사람들과 함께 모이고 교제할 수 없을찌라도 전화나 문자 혹은 비데오 통화를 통하여 삶을 나누면서 그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베푸실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으시는 생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