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이 될려면
마13:18-23
공부 못하여 대학에 못가던가 취직이 어려우면 "농사라도 짓지 뭐?" 그랬다. 농사는 쉬우니까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농사는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서 실패하는 원인은 땅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농사에 성공하려면 땅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 땅 이야기를 하십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그 씨들이 길 가에, 돌밭에, 가시떨기 위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졌다. 앞의 세 곳에 떨어진 씨들은 잘 자라지 못하였으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큰 결실을 맺었다는 내용입니다. (마13:3-8)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해설까지 해 주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밭 즉 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질이 어떤 땅이냐에 따라 농사성공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여러 밭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즉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묘사하신 다양한 마음 상태는 네가지입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같은 마음," "좋은 땅과 같은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네 가지 마음의 유형은
<길 가와 같은 마음> '목이 뻣뻣한 사람'(출애굽기32장)
<돌밭 같은 마음> 환란이나 핍박 때 믿음을 잃는 경우입니다.
<가시나무가 있는 땅과 같은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마태13:22)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지 못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13:23)라고 하셨읍니다.
농사가 잘 될려면 땅이 좋아야 하지만 사람이 성공하려면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이 생각을 좋게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자신들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좋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의 상태가 길가와 같을 수도 있고 돌짝밭 혹은 가시떨기가 있는 마음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마음밭이 되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 마음 밭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라 어떻게 밭을 일구는지 압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좋은 땅은 개간해서 일구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려면 소의 목에 멍에를 걸고 소를 몰면서 그 멍에와 연결된 쟁기를 통하여 쟁기질을 합니다. 이 쟁기질을 통하여 땅을 깊이 파다보면 돌들도 드러나고 가시넝쿨도 뿌리채 뽑히게 됩니다. 그러면 돌들과 가시넝쿨같은 잡초들을 거두어 버리고 땅을 골라 밭을 만들고 거기에 다가 씨를 뿌려 농사를 짓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을 깊이 판다는 것입니다. 소에 쟁기를 걸고 땅을 갈다보면 대게 땅이 12인 인치 정도 깊이로 파여집니다. 그러면서 돌들도 잡초들도 다 제거되어집니다. 뿐만아니라 땅을 뒤엎으면 흙에게 새 공기를 씌워주고 영양소를 땅위로 끌고 와서 식물의 성장을 돕습니다. 또 이 작업으로 잡초를 땅속으로 묻어버릴 수도 있읍니다.
저는 쟁기를 사용하여 땅을 깊이 파는 이 작업을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우리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잘못된 선입관과 의심 그리고 염려와 유혹을 제거할 수 있읍니다.
묵상이란 무엇인가?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다’ ‘진리에 대해 반복적으로 깊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원어적인 묵상이란 말은 “사자가 먹이를 잡고 움켜쥐고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몰라서 내는 즐거운 신음 소리‘입니다.
꼭 사자가 아니더라도 강아지기 짐승의 뼈를 가지고 은밀한 곳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물어뜯으며 그 맛을 즐기며 나지막하게 가랑가랑 소리를 내는 소리랍니다. (동양의 명상과 다르다.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만 묵상은 마음속에 말씀을 채우는 것이다.)
묵상은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즐거움에 빠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묵상이란 진지하고 심각한 측면이 있지만, 묵상은 본질적으로 너무나 즐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말씀 묵상하는 것이 꿀보다 더 달다, 전리품을 나누는 일처럼 기쁘다(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시119:162)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고 표현합니다. 왜 이렇게 묵상이 기쁘고 즐거운 일일까요? 왜냐면 묵상은 하나님을 맛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묵상을 불교나 힌두교나 뉴에이지의 수행 방식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약 200년간 개신교회로부터 외면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묵상은 아주 오래된 성서적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천년전에 기록된 시1편은 ‘복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묵상을 설명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가장 확실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으며, 사랑의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 사랑의 사귐을 원한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하는 방법
성경을 읽을 때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연구목적으로만 읽으면 성경은 일반서적이나 신문을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앙은 그리고 영성은 전혀 형성되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읽기의 목적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따라 내 삶을 formation해 가는 것입니다. 빨리 많이 읽기보다 천천히 깊이 읽어 갑니다.
물론 성경다독, 학문적 연구와 같은 읽기도 필요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하는 자세의 성경읽기의 전제는 성경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현재의 나에게 무언가 말씀하시려는 메시지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성경읽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됩니다. 일반 서적이나 신문 읽듯 읽을 수 없습니다. 기대가 생기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곱씹어 읽게 됩니다.
이 말씀이 내게 뭘 말하고 있는 걸까 귀 기울이게 됩니다.
어떤 분의 경험담입니다. 중학교 1학년 무렵, 교회에서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얼굴이 하얗고 피아노도 잘 치고, 말 수가 없는 신비한 여학생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속앓이를 하며 혼자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교회를 가는 길에 운명처럼 그 여학생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당황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대충 인사를 나누고는 교회를 향해 걸었습니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문득 그 여학생이 주저주저 하다가 남학생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유진아,….”
이럴수가! 내 이름을 부르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 얘도 나를? 잠간동안 별 생각을 다하다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왜?”
그 여학생이 부끄러운듯 고백합니다. “너… 눈썹이 너무 착하게 생긴 것 같애….”
그 후 그 남학생은 그 말을 가지고 얼마나 오랫동안 묵상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부분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별 뜻없이 던져진 이야기도 곰곰히 생각하고 곱씹어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삶과 존재와 영혼을 향해 그토록 소중한 말씀을 건네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대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렇게도 날마다 건네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묵상으로서의 성경 읽기는 읽기가 아니라 ‘듣기’ 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듣는 자세로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해 주고,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숙하게 formation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성경이 쓰여진 목적에 가장 합당하게 성경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묵상해야 이해가 되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돕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이란 우리를 대하여 관심가지시고 우리를 생각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깊이 되새기며 반복하여 생각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러하다보면 우리 마음속에 있던 잘못된 선입관이나 오해가 사라지고 염려와 유혹도 극복하게 되고 우리는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은 모두 왕이었읍니다. 모두 하나님의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분의 부르심을 입었읍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왕이 되었읍니다. 한 사람은 폭군으로 전락했고 다른 한 사람은 성군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있었을까요? 무엇을 묵상했는가가 달랐읍니다.
사울은 다윗만 묵상했읍니다. 다윗에 대한 경쟁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정적 제거를 사명인양 여겼읍니다. 반면 다윗은 주야로 하나님을 묵상했읍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죽이도록 미운 원수가 아니라 즐겁고 복된 말씀을 밤낮 읊조리는 것이 그의 낙이었습니다.
시편1편은 복있는 사람을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시1편을 다윗이 쓴 것을 추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원수를 묵상하다 웬수같은 인생을 살았고, 다윗은 성경을 묵상하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는 복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생각한 대로 삽니다. 생각 없이 살아도 문제지만,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제일 많이 생각하는가. 어떤 것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하나님인가 원수인가. 말씀인가 빵인가. 분노인가 용서인가. 그것이 나를 사울로 만들수도 있고 또 나를 다윗으로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갈1:7)라고 분명히 진술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고, 거기서 3년 동안 체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거기서 조용히 칩거하면서 깊은 기도와 묵상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모든 인간적인 접촉을 끊고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회심한 뒤에 바울이 간 곳이 시내 산이 있는 아라비아 사막이라면 그곳에서 그가 3년 동안 기도하고 묵상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광야나 사막에서는 기도와 묵상 이외에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난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귀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내게 주셨던 그 말씀들을 잊지말고 묵상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누구든지 카톡을 통하여 그 말씀을 다운 받을 수 있고 우리는 그 말씀들을 반복하여 들으면서 그 말씀을 죽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시 1:1)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