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우신 우리들의 왕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하나님이 정말 있기는 한 거야?”
이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의문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제기된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주변의 모든 일들이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 같음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저자가 되는 스가랴는 그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을 때에 태어난 유대인 2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땅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아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스가랴 시대에 귀환한 백성들의 어려움은 비단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스가랴 시대에는 왕이 없고 총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없는 억울함, 왕이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신 멧세지는 공의로운 왕을 보내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말씀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크게 기뻐할 이유가 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시고 이루시는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 임하신다! 는 것입니다.
그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신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550년 지난후 이루어 졌습니다.
주님의 공평하심...가난한 자들의 동네에서 자라나셨다. /소외된 지역인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다./ 과부와 아이들을 사랑해 주셨다/ 재산과 지식유무를 떠나서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을 제자로 사용해 주셨다./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거처를 약속하셨다./충성한 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셨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지도자와는 다른 진정한 왕이 되십니다.
오늘 예언에서 “그는 공의로우시며” 라고 말했습니다. 공의(公議)라는 단어는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줄인 말입니다.
지도자가 공의로울 때 인간사회에 불공평하고 부정한 일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분과 위치에 따라 불이익 차별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당연히 그러하며 또 그런 방향으로 그분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을 그분의 공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가 그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다음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실 때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했습니다. (신명기 32:4)
스바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스바냐 3:5)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으면서도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아들이 있었읍니다. 요셉입니다. 4명의 각기 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들이 있었는데 요셉은 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 대상이 되어 애굽으로 팔려갔읍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죽을 고생을 했고 심지어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수감되어 몇 년간 지내야 했읍니다. 참으로 불공평한 인생을 살았읍니다. 그랬던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일약 애굽의 총리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자기를 팔아먹었던 형들이 그의 발밑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양식을 구걸하고 있었읍니다. 형들의 모습을 보고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대성통곡을 한차례 하고 난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읍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45:4)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비록 형들에게 미움 받아 팔려온 불공평한 인생이었지만 형들이 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것이라며 공평함을 인정했습니다.
요셉에게 공평하게 행하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공평과 정의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던 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틀림없이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9)
바울은 자기가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을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그로 하여금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우리가 때로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겉으로 보면 불공평한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고난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온 몸이 뒤 틀린 사람이 있었읍니다. 말 한마디를 하려면 머리 손 발 모두를 제각각 방향으로 뒤튼 다음에야 어렵게 한 마디를 하곤 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중증 뇌성마비 환자였습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읍니다.
출생시 의사의 부주의한 실수로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그녀의 소뇌에 손상이 갔습니다. 너무 고통이 심했던 아기는 울지도 몸을 가누지도 못했습니다. 여물지 못한 계란처럼 아기의 머리는 만지는 대로 푹푹 들어가기만 했습니다.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와 과로로 병들어 있었고, 어머니도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없을 만큼 약했습니다. 우유마저 사먹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다른 집에서 얻은 쌀가루 끓인 물로 아기에게 먹였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기의 마음에 담긴 것은 원망과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는 하루에 5시간씩 보배이신 그분께 기도했습니다. 매일 보배의 말씀인 성경을 통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뇌성마비 장애인의 머리에 ‘공평하신 하나님’ 이란 단어가 떠올랐읍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읍니다. 그는 그 마음속에 다가온 감동을 글로 기록했읍니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은 한국 복음성가 작사 대상을 수상하게 하셨고, 한국 기독교 저작 최우수 도서상을 수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송명희 시인입니다. 그는 비록 중증 장애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작사한 “나 가진 재물 없으나”는 그녀의 그런 은혜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는데 어떤 사람은 부자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고생만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할짓 못할짓 다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남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장애인인가? 어찌 이것을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해 보면 "행복"은 돈이나 지위나 물질이나 지식으로만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행복할 수 있고, 천하를 다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물질과는 상관없이 누구든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셨으니 이것이 공평입니다.
우리는 우리주변의 모든 일들이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 같음을 느낄 때 우리는
둘째는 하나님의 종말 심판을 의뢰해야 합니다
이 땅에선 완전한 공의가 실현되기는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일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최후심판으로라도 당신의 공의를 당신께서 바로 세웁니다.
하나님이 악인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벌을 주어서 사회정의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바로 세우는 일도 당신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느 농부가 신문사 편집인에게 원고를 보냈습니다.
“나는 일요일에 밭을 갈았습니다. 일요일에 씨를 뿌리고, 일요일에 거름을 주고, 일요일에 추수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에 추수한 곡식을 집으로 실고 왔습니다.
그러나 내 이웃 농부는 일요일에 교회를 갔어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온 지 아십니까? 9월에 거둔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이웃에 사는 어느 농부보다도 많았습니다.”
편집인은 이 글을 싣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은 9월에 모든 것을 결산하지는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심판의 날에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7)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따라서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소망과 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