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받지 못할 때
(창 29:31)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 30: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여자와 남자가 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때라고 합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남편에게 당신이 아닌 사랑을 주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든지, 남편 자체가 무뚝뚝한 편이여서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수십 년의 결혼생활해보면 그것이 표현의 문제인지 다른 것의 문제인지 구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방법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레아는 단순히 눈만 봐 줄만 했고 여러모로 곱고 아리따운 라헬의 미모와 비교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평생 자기 동생 라헬의 빼어난 미모에 가려진 채 살아야 했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동생과 자기를 비교했을 것입니다. 레아를 비웃든지 아니면 동정했습니다. 이것을 느끼는 레아는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기가막힐 사건은 야곱이 동생 라헬과 결혼하는 날 아버지 라반은 라헬을 기다리는 야곱의 장막에 언니 레아를 들여 보냈습니다. 야곱이 신부와 함께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에 레아가 누워있는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시집 보낼수 없다는 전통을 빌미로 레아와 잠을 자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한 여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라헬을 기다리는 야곱의 장막에 동생을 대신해서 아버지에 의해 등떠밀려 들어가야 했던 레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처량한 신세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레아는 남편이 원하지 않는 아내가 됩니다.
그래서 가장 짧은 신혼기간을 보낸 여인 레아는 남편이 원하지 않는 여자로 삽니다.
우리는 레아가 4명의 자식을 낳으면서 지은 이름들을 통해서 그가 그동안 얼마나 힘든 결혼생활을 해 나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창 29:32)’라는 뜻입니다. 그말은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괴로움이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둘째 아들은 ‘시므온’인데 여호와께서 아직도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음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레아가 야곱에게서 첫아들을 낳았지만 여전히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아들은 레위인데 그 뜻은 ‘지금부터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창 29:34)입니다.
늘 동생 라헬에게만 가있는 남편 야곱의 마음이 자기와 연합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간절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레아의 마음은 늘 공허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레아의 마음은 무척 외로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남편이 여동생을 품에 안고 있으니, 그 모습을 봐야 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지옥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많이 아팠던 레아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사건이 ‘합환채’의 사건입니다(창 30:14∼21). 합환채는 보통 여성의 생산 능력을 높여주는 데 유익하다고 알려진 식물입니다.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왔는데 자식이 없어 불행했던 라헬이 레아에게 합환채를 팔라고 부탁합니다. 레아의 반응입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창 30:15).”
“남편을 빼앗겼다”는 이 말은 그 동안 야곱이 레아를 가까이 하지 않고 라헬만을 총애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합환채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야곱을 원했던 레아의 간절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사실 레아가 이렇게 많은 자녀를 낳게 된 것은 사랑받지못하는 레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을 받지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창 29:31)”.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아셨고, 그것을 보고 계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동생보다 못 생겨서 서러운, 동생이라고 속이고 첫날밤을 맞이해서 기구한, 또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 처절한 한 여인의 삶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태를 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위안이요, 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작고 소박하고 약자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궁극적으로 레아는 그녀의 자녀인 유다를 통하여 메시아가 탄생하는 특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찾아오셔서, 그녀를 예수님이 태어나실 계보의 조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세상에 구원이 임하도록 한 통로는 아리따운 라헬이 아니라, 볼품없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했던 레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약자를 사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레아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자신의 조상 레아처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사 53:2, 새).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 1:11) 또 그분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그분을 버렸고,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께마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분은 왜 레아의 후손이 되셨습니까? 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셨습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레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단순히 약자이기 때문일까요? 물론 차별당하는 약자이기 때문도 있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은 답답한 상황에서 레아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창 29:33) 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아들을 주셨구나)
레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은 그녀의 답답한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었기 때문입니다.
레아가 기도했다는 것은 그녀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레아는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한 여자로 살았으나, 마침내 레아는 자기 마음속의 가장 깊은 소망을 남편이나 자녀에게 두기를 포기하고, 주님께 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친히 그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내가 너의 참된 남편이다. 나는 남편 없는 자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친히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연약한 사람,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해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분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인 관계입니다. 아무도 봐 주지 않거나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까지도 그렇게 기뻐해주십니다.
사랑할 상대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이러한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 라헬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과연 행복했을까요?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창 30:1) 자식을 낳게 하라고 야곱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 그녀 또한 자식이 없기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는 했었어도 불행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죠.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없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레아가 불행했던 것은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자식의 복을 받았지만 라헬이 받는 남편의 사랑을 계속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헬이 불행해 했던 것은 자기에게 넘치는 남편의 사랑이 있었음애도 불구하고 레아에게 주신 자녀들의 축복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자신에게 없는 것 때문에 불행해 하지않고 이미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라헬보다 레아가 영적으로 더 성숙합니다. 왜냐하면 세 아들을 낳은후에도 남편의 마음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남편에게 기대를 걸지않고 하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라헬도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자식을 갖게 됩니다.
(창 30: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창 30: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자기의 여종을 통해서라도 아들을 낳아 언니와 경쟁해 보려던 그녀였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지를 않자 인간적인 수단방법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라헬이 기도를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그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추구할때는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다가 하다하다 안되어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때 기다리셨다는 듯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요셉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을 얻게된 라헬은 하나님께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자녀를 더하시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라헬의 소원을 귀한 것으로 인정하셨고 결국 그녀의 소원대로 베냐민을 얻게 해주셨습니다.(창35:17절),
라헬은 요셉 출산을 계기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요셉의 출생을 통하여 더 이상 이전의 라헬이 아니라 신앙으로 행하는 거룩한 어머니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더 많은 자녀들을 낳기 위하여 과거처럼 인간적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소원을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