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벧전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죠지 휫필드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3,000번 이상을 “거듭나야 된다”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떤 교인 한 사람이 죠지 휫필드에게 정색을 하며 물었읍니다.
“목사님은 왜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만 그렇게 자주 하십니까? 정말 듣기가 거북스럽습니다. 도대체 설교할 말씀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하도 많이 들어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
그러자 죠지 휫필드 목사님은 심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자연인으로서 어머니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읍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듭남이라는 절대적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죄 인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성품이 잘못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오히려 미워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도리어 사랑하는, 타락한 성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관심,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다거나, 정기적인 예배에 출석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벧전1:23에는「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감동하셔서 마음과 문을 열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회개하게 하셔서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십니다.
「빌리 그래함은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러나 그는 20대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읍니다. 어느 날 그가 친구와 함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읍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마친 후「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으나 빌리 그래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읍니다. 다음 날도 친구의 반 강제에 의해 또 그 부흥회에 참석하였읍니다. 어제와 똑같이 “결신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은 전혀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친구가 반강제로 빌리 그래함을 끌고 앞으로 나갔읍니다. 그래도 빌리 그래함의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읍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읍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나고 나서 자신의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읍니다. 그의 귀에 계속적으로 지옥, 심판, 형벌, 예수, 구원, 십자가, 천국이 반복적으로 쟁쟁 거렸읍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빌리 그래함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읍니다.
하늘을 보아도 어제 본 하늘보다 더 맑고 푸르게 보였읍니다. 길가의 야생화를 보아도 이전에 보던 것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빌리 그래함을 거듭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나무 잎이 흔들리거나, 바람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 수 있읍니다. 그와 같이 거듭난 사람은 그의 삶을 보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됩니다. 이전에는 시시하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중요하게 보이고, 이전에 중요하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시시하게 보입니다.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심스럽게 보였으나,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가깝게 느껴지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불신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심령은 언제나 평안하고, 생활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던 것이 이제는 싫어집니다. 전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좋아 보입니다. 전에는 미워했던 것이 이제는 더 없이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감격스럽게 느껴지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여러 분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할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1-2)
베드로는 거듭난 자가 사모해야 하루 말씀을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순전하다는 것은 ‘순수하다’, ‘정결하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감정과 정서와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우리는 그 안의 순결한 정서를 먹게 됩니다.
실제로 말씀을 많이 듣고 읽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다 보면, 놀랍게도 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들어 있는 깨끗한 감정과 정서를 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으면. 이전에 걱정하던 마음, 근심하던 마음, 두려워하던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먹으면 추잡한 생각, 더러운 욕심, 음란한 마음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먹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여러분, 교회 오면 목사가 맨 날 ‘성경 읽으세요. 큐티하세요. 삶 공부 좀 하세요.’ 하며 귀찮게 하는 것 같습니까? 말씀 때문에 귀찮게 해드리는 게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멀리할수록 악한 정서들이 담긴 인간의 말만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정서와 감정과 분위기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왜 자주 침체되거나 분노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답답합니까? 말씀을 안 먹고 맨 쓸 데 없는 것이나 악한 것들을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혹시 지금도 어떤 일 때문에, 어떤 사람 때문에, 자녀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까? 답답합니까? 화가 납니까? 포기하고 싶습니까? 말씀을 붙드십시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외워보십시오. 내 마음이 바뀝니다. 정서가 바뀝니다. 내 삶의 분위기가 바뀌고 평화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순전하게 변화됩니다. 말씀 안에 담긴 거룩한 정서 때문에 말씀을 붙들면 아름다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말씀을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신령한’이라는 말은 헬라문학에서는 ‘합리적인, 이성적인, 논리적인’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논리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정서와 감정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논리와 지혜와 이론과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이론,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내 생각을 고집하며 살면 오는 것은 절망이고 내 논리, 내 생각으로 보면 가망이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해석,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았더니, 거기에는 선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게 분명히 보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건강을 잃은 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제가 건강을 잃지 않았으면 저는 하나님 앞에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이 재산을 잃지 않았으면 저는 결코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그때 실패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못된 짓만 하고 있을 겁니다.” 이게 바로 신령함입니다. 하나님의 논리로 보니까 하나님의 이론으로 보니까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막혔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왜 막혔나 했더니 조금 더 갔으면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논리는 당장 편한 길을 택할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논리는 때때로 험한 길, 꾸불꾸불한 길, 내가 손해 보는 길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논리는 언제나 맞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먹을 때 바로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 하나님의 이론, 하나님의 논리를 먹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우리가 하루 세끼 먹어야지 우리 체력을 유지하듯이 신령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양식을 먹을 때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열심히 빨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열심을 가지고 사모해야합니다.
저희집에는 두 손녀가 와 있습니다. 너무나 귀엽습니다. 그런데 작은 손녀는 너무나 잘 먹습니다. 그러니 아주 건강합니다. 힘도 언니보다 셉니다. 잘 먹는 아이가 건강하고 잘 큽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좋아지려면 말씀읽는 일에나 성경공부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우리가 신앙으로 성장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디(Dwight Moody)라는 유명한 부흥강사가 있습니다. 무디가 처음 예수 믿고 너무 좋았습니다. 무디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산속에 올라가서 일주일동안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와 예전의 생활로 돌아오니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유명한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열심히 부흥집회에 참석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한두 해 지나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에 빠질 즈음에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무디가 여기에 진리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때부터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훌륭한 부흥 강사가 되어 수많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안한 인생들에게도 담대함과 용기을 줍니다. 낙심한 인생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능력의 말씀이고 소망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신문 읽고 소망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설책 읽고 낙심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든지 절망에 처한 사람 낙심에 처한 사람 용기를 잃은 사람 불안해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됩니다.